영 케어러(young carer)는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콜·약물의존을 가진 가족 등을 돌보고 있는 청년을 일컫는 말입니다. 농인 부모의 자녀인 코다도 영 케어러로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영 케어러의 눈으로 코다를, 코다의 눈으로 영 케어러를 이야기합니다.
강연자: 조기현 (작가, 영화감독) 스무 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새파란 돌봄’이 됐다. 아버지를 돌보며 겪은 일을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 담았고, 치매가 시작된 아버지의 노동과 생애를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로 기록했다. 영 케어러 일곱 명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모아 『새파란 돌봄』을 썼다. 영 케어러 자조모임 ‘N인분’을 운영 중이다.
사회 및 대담: 이길보라 (코다코리아 대표) 일시 : 2022.07.06.(수) 20-22시 장소 : 줌(ZOOM)을 활용한 실시간 비대면 강의 대상: 누구나 신청방법: 하단 QR코드 혹은 링크 참가비: 무료 수어통역, 문자통역 제공 주최: 코다코리아
전체 영상
수어통역 : 이한나, 조미혜 문자통역 : 에스유디컴퍼니 주최 : 코다코리아
강연 기록
이길보라 : 지난 번에는 수어유산으로서의 수어에 대해서 코다 당사자이자 수어통역과 교수로 활동하는 수(Su)가 코다가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는지, 코다가 사용하는 수어란 무엇인지, 유산으로서의 수어는 무엇인지 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강의였다면, 오늘 강의는 한국 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영케어러 담론과 코다 담론을 함께 이어보는 작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저희도 처음 하는 것이고 영케어러 담론을 계속해온 조기현 작가님도 이 강연을 통해서 처음으로 코다 담론과 영케어러 담론이 어떻게 함께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이야기해주실 거라 생각하는데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돌봄이라고 하는 것, 코다가 어렸을 때부터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할 돌봄이라는 것. 코다도 농인 부모의 돌봄을 하기 위해서 사회적 자원이 필요하고, 코다 당사자 역시 계속해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사회적 돌봄이라는 것, 보편적 돌봄이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강연을 해주실 조기현 작가님을 제가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 조기현 작가님을 모시게 된 이유는 영 케어러 당사자이자, 작가이자 활발한 활동을 하시면서 한국사회에 영 케어러 담론을 알리셨는데요. 영 케어러 담론을 지켜보면서 영 케어러가 하는 경험들과 고민들이 코다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 케어러가 뭘까?’ 하고 조기현 작가님이 쓰신 책과 쓰신 기사들을 많이 찾아봤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보면 볼수록 영 케어러의 이야기가 코다의 이야기와 똑같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 조부모를 돌본 경험들이 코다의 경험과 몹시 똑같다, 그리고 사실은 영 케어러라는 집단 안에 코다의 경험도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영 케어러 담론과 코다 담론이 함께 갔을 때에 서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조기현 작가님을 모시고 이런 저런 논의를, 영 케어러에 대해서 배우고 이런 저런 논의를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조기현 작가님을 오늘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조기현 작가님은 스무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새파란 돌봄이 되었다고 소개하는 분인데, 영 케어러 당사자이고 아버지를 돌보면서 겪은 일을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 라는 책으로 담았고, 그다음으로 최근에는 영 케어러 당사자의 이야기를 엮은 〈새파란 돌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영화도 만드십니다. 아버지의 노동과 생애를 〈1포, 10KG, 100개의 생애〉라는 영화로 만드셨고요. 개인적으로 글도 쓰고 영화를 만드시는 분이라, 저도 그렇기 때문에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 케어러들의 자조모임 『N인분』을 운영하셔서 코다코리아의 고민과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당사자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저는 조기현 작가님을 이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반짝이는 박수소리로 환영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기현: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조기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영 케어러이고, 20살 때부터 했던 경험을 좀 더 공유하고,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서 책을 썼고요. 그 책을 쓴 이유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 케어러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책을 만들기 위해서 정책 현장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길보라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 강의를 준비하면서 제가 활동하면서 놓치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됐어요. 바로 코다의 경험을 어떻게 영 케어러 지원책 안에서 풀어낼 수 있느냐 라는 고민을 이전부터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동시에 분명 코다의 경험들이 한국 언론이나 정부에도 파악이 됐는데, 그건 왜 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논의의 장에 들어오지 못했는가. 이런 고민도 조금 남기는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는 이제 조금 알려진 말인것 같아요. 코다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사회 많은 곳곳에 설명해야 되는 곳이 많은데요. 포스터에 영 케어러가 뭔지 설명을 해놨습니다. 한번 읽어볼게요. ‘영 케어러는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콜, 약물의존을 가진 가족 등을 돌보고 있는 청년을 일컫는다. 농인 부모의 자녀인 코다도 영 케어러로 자라고 태어납니다. 코다의 눈으로 영 케어러를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강의 목적까지 적었습니다.
오늘은 말 그대로 교차점을, 대담에서 집중해서 말씀을 나눌거고요. 영 케어러 이슈가 갑자기 등장해서 몇 개월만에 대책도 마련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이러는데, 이것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그리고 무엇의 징후이냐. 저는 영 케어러가 단순히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조금 더 가시화 한다. 이 사회에서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가 조금 더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데 있어서 짚어볼 수 있는 함의들이 있다는 것을 같이 이야기 나눠보려고 합니다.
그 다른 사회라고 하면 바로 돌봄이 중심이 된 사회. 누군가 돌보는 것이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사회로 가는 이행의 지점들이 있다. 그러려면 언론에서 “영 케어러, 불쌍해.” 이렇게 다루는 시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고, 그것을 좀 더 다른 결론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 케어러의 성격과 쟁점을 먼저 이야기 나누려고 해요.
앞으로 어떤 쟁점들이 있느냐.
영 케어러는 이러한 청년이다 라고 정의 하는 것을 넘어서 외부의 맥락들을 여러분들에게 세세하게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영 케어러와 돌봄 사회에서는 우리가 영 케어러라는 존재를 영(young)에 집중할 거냐. 케어(care)에 집중할 것이냐에 따라서 그릴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다의 경험도 마찬가지로 어떤 경험들에 집중해서 중심이 되지 못한 경험을 이 사회의 중심 경험으로, 이 사회의 중심으로 놓을 것이냐를 같이 논의할 장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대담을 하려고 합니다.
영 케어러의 성격과 쟁점입니다. 올해 2월에 영 케어러에 대한 지원 정책이 정부 단위에서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원정책은 세세하게 다 설명드리지 않을게요. 이건 검색하면 나오기도 하고, 제가 중요한 건 뒤에서 언급할텐데 사실 돌봄서비스의 양을 늘리겠다. 그리고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잘 발굴하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는 보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보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영 케어러가 어려움을 겪는데, 그것이 중첩된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집에서 돌봄을 해야 되고 보호자로서 역할을 해야 되는데, 거기에 들이는 시간도 있는데 청년기, 청소년기에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학원 다 다니고 공부도 하고 진로나 취업에 필요한 진로 이행에 대한 부담도 한편 지고 있고, 동시에 어느 경우에는 부모님이 아프다 보니까 생계에 많은 부분까지도 담당하고 있더라. 그래서 삼중의 부담 ‘진로, 돌봄, 생계’의 부담을 지고 있는 중첩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게 정부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입니다. 이건 뒤에 가서 더 설명드릴텐데, 중첩된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낼 것이냐. 꽉 짜여져 있는 실뭉치를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마련할 것인지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띄운 '22살 청년 간병인의 살인'이라는 기사가 가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강도영 사건이라고 이야기가 많이 됐는데요. 우리가 영 케어러 대책이 급물살을 탄 건 이 이슈가 작년 12월에 회자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작년 5월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11월에 대선 후보들이나 국무총리가 ‘22세 청년이 간병인을 살인한 것이 단순히 살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복지나 돌봄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문제도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면서 회자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서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22세 청년 간병인의 일은 과연 이 사람에게만 일어날 일이었는가? 라는 쟁점인데요.
그 이유중 하나로 먼저 간병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간병인은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러고 나서 병원비가 없어서 삼촌에게 병원비를 달라고 손을 벌립니다. 실제로 자기도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를 가야 할 시기였는데 취업도 마땅치 않고, 그러다 보니까 돈을 계속 빌리게 되는데 친구들한테는 생활비로 할만한 1~2만원 빌리고, 삼촌한테는 2천만원 가량의 간병비를 빌렸습니다. 그런데 삼촌조차도 이 돈을 이혼을 감수하고 몰래 빌려준 돈이라고 해요. 결국 이것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청년 간병인이 이 아버지를 살해하게 된, 굶겨서 더이상 내가 아버지를 책임지지 않게 되는 선택들의 맥락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세 가지 함의가 있는데 이 세 가지 함의는 사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나에게 위기가 됐다.’라고 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호소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한번 볼게요. 내가 가족을 부양하면서 위기를 겪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위기의 종류, 성격을 가장 많은 비율이 첫 번째로는 당연히 부양의 자녀 양육과 부양의 어려움을 들고요. 그다음 경제적 어려움입니다. 그다음은 갑작스러운 질병. 질병에 대한 돌봄이나 보호, 간병도 해야 되고, 병원비도 내야 하는 이 세 가지가 중첩되는 상황이 아까 이야기했던 강도영 씨의 상황인데, 한국사회 전연령이 이것을 똑같이 호소하고 있다면,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인구구조와 가족문제가 바뀌면서 가족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인구도 계속 고령화되고 저출생의 상황에서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한 사건으로만 고정적으로 귀결해서 보지 말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먼저 이것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어렵다고 호소하는 세가지가 다 몰려 있는 사건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격적으로 영 케어러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영 케어러 초반에 얘기할 때는 영 케어러가 아동 또는 청소년 혹은 청년 이렇게 정의가 다양해요. 그러다 보니까 도대체 영 케어러 나이 연령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단어를 보자마자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영 케어러는 진로이행시기에 자기가 어떤 미래에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노력해야 될 시기에 당장의 생계나 돌봄까지 해야 된다는 문제의식으로 명명하게 되는 말인데요. 근데 나라별로 이 시기를 규정하는 나이는 다릅니다. 영국은 아동 시기로 정해서 만18세 이하로 정했고, 호주는 초기 청년 넘어서 25세로 나이를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국가별로 진로이행시기의 어려움이 어디까지 가느냐가 쟁점이 될것 같습니다. 혹은 보완하는 다른 정책이 있느냐는 고민이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영 케어러가 만약 18세까지라면, 영 어덜트 케어러라는 방식으로 취업을 도와주는 정책도 필요하다. 나이가 30세가 될 때 까지 그 진로이행의 어려움은 계속되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을 돌보면서 밀리지 나이가 들었다고 해결되거나 풀리지 않는 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단순히 내가 주 돌봄자, 전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정 내에서 장애가 있거나 아픈 사람이 있으면 계속 주돌봄자는 아니더라도 보조해서 계속 돌보는 상황. 주돌봄자가 자리를 비울 때 돌보는 상황도 영 케어러의 특징 중 하나다. 네가 좀 더 잘 하라거나, 어른스럽게 해야 된다거나 이런 압박으로 조금 더 부모님을 보조하는 역할을 잘 하는 영 케어러들도 있죠. 그래서 그런 영 케어러까지 포함해야 된다. 이런 역할과 위치와 주돌봄자뿐 아니라 보조돌봄자까지. 그리고 나이는 여러 상황으로 논의되고 있고, 보통 18세까지 영 케어러로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은 2월에 발표했고 4월에 1차 조사를 했고, 그중에서 굉장히 많은 수의 유의미한 집단이 나왔다고 해요. 양적 조사로. 그래서 2차 조사를 실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연령구분을 청소년 인구도 하고, 만 34세까지 한국에서 청년기본법이라는 법에 의해서 정의된 청년 나이까지 같이 조사합니다. 굉장히 넓은 나이 폭의 조사예요. 근데 그중에 하나는 한국에서 만 34세까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문제의식에서 만 34세라는 나이를 정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하기 직전까지 국제비교에서는 영 케어러 인식과 정책대응 수준에서 1단~7단계로 한다면 한국은 7단계, 무반응국가. 아무런 대응도 없는 국가로 이야기됐습니다.
그런데 가장 우리가 뒤에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가장 높은 국가가 2단계가 영국이에요. 그런데 영국은 커뮤니티 케어, 지역사회 돌봄을 이야기할 때 굉장히 많이 참조하는 나라입니다. 1980년대부터 커뮤니티 케어를 진행해왔고, 또 하나 영국의 특이점은, 영국은 아예 법으로 '비공식 무급 돌봄자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라는 이념을 가진 케어러 액트라는 법이 2014년부터 시행중입니다. 비공식 돌봄자도 지원하고, 일상에서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가족들을 지원하는 행위에도 문제 의식을 갖고 대응하고 있고, 커뮤니티 케어로 대응하는데, 거기에 플러스 영 케어러도 대응하고 있는 거죠.
한국사회는 지역사회 돌봄(이 있는데), 지난 정부 내내 말은 많이 들었지만 우리 눈앞에 과연 어땠느냐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시범사업의 유무도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지금 이런 고민들도 뒤에서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 규모는 국제기구상으로 아직은, 곧 공개되겠지만, 청소년 인구로만 보면 한국에서 그 정도 주돌봄자, 보조돌봄자까지 합쳐서 18만에서 30만까지로 추정합니다. 많은 숫자이고, 이 숫자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나 시민단체가 전무하다는 것도 정말 뭔가 희귀한 일이죠. 그래서 이런 조사결과가 나오면 구체적인 숫자가 확인될것 같습니다. 공통적으로 이야기되는 부분들을 제가 추려왔어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제가 아무래도 급성기 질환, 갑자기 쓰러지고 장기들이 아프고, 수술받고 하는 급성질환 이후에 만성화 되고 인지가 저하되고, 치매가 시작되거나 이런 경우에 영 케어러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까 그쪽 이야기가 치우쳐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코다의 경험들을 읽어보면서 다르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돌봄의 역할을 지원하거나 준비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간이 없이 바로 어느 날 갑자기 돌봄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돌봄을 나눠지거나 협력할 수 있는 어른이나 가족이 없다는 것도 특이점 중 하나입니다. 형제는 아직 너무 어리거나 본인도 어리니까 동생은 더 어리다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책임을 안 넘기는 경향도 있고요. 가족 규모가 축소되고 핵가족화 되기 때문에 협력할 수 있는 어른이 없고 혼자 감당해야 되는 상황을 어린 시절부터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중 부담.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다닐 때 사실 퇴근하고도 여전히 일을 해야 되는 상황. 그것은 가사일 수도 있고, 돌봄일 수도 있고, 이중 부담을 계속 지고 있는 상황. 그리고 고립의 문제. 이 경험들. 아픈 가족을 돌봤다는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많이 어려움들을 호소했습니다.
코다도 마찬가지로 이 경험들은 코다코리아로 연결되기 전에 고립됐던 것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정말 판박이처럼 비슷한데, 어렸을 때 부터 책임을 다하라는 말, 효자효녀가 되라는 압박은, 어른들은 그것이 억압인지 모르고 그 아이의 노고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쓰기도 하고 딱히 할말이 없어서 하기도 하는 말이죠. 이런 압박, 공통적으로 '착한 아이' 압박 같은 것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 케어러의 특이점일 수 있는데, 부모나 형제가 빨리 아프다 보니 돌봄정책의 서비스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 대부분 생계지원도 정확한 병명이나 장애가 없으면 65세 이하, 노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로능력이 있고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 왜 일을 하지 못하느냐는 말을 공통적으로 주민센터에 가서 듣고 터벅터벅 아무것도 못 받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고요.
그런데 동시에 그렇게라도 찾아가면 한편으로 다행입니다. 정말 그런 것도 있는지 몰라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병원비가 많이 나오고, 우리에게 재산이 없을 때 긴급복지의료지원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바로 구청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는데,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안 알려주죠. 저조차도 며칠 전에 또 아버지가 심장이 안 좋아져서 입원하게 됐는데, 입원하는 모든 전 과정에서 이런 정책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팜플렛이나 아무것도 사실은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정책 접근성의 문제가 오히려 또래들끼리 그런 경험이 많으면 "이런 거 해봐. 재난적 의료급여가 있더라."라는 이야기를 할텐데 그런 커뮤니티조차 없다는 것이 큰 문제 중 하나고요.
그리고 가족책임이라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건 코다도 사실은 태어나자마자 겪게 되는 문제이기도 할텐데, 이게 내가 뭔가를 수행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수행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같아요. 제도적으로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여전히 의료비에 한해서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의료급여라고 하는 제도에는 부양의무자 기준의 폐지계획이 없습니다. 지금 까지. 그리고 어느 기관에 가거나 대리를 하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기 때문에 그런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수 있는 사람의 책임이 당연히 늘 수 밖에 없는 행정절차 시스템을 우리가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어떤 판단을 내리거나 어떤 사람에게 중대한 판단을 내릴 때 의식이 없을 때, 병원에서 특히. 그걸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어떤 의료법에도 가족이 그런 것을 해야 된다는 것을 상정한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으로 당연히 가족이 그런 결정을 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서비스를 신청할 때도 어떤 기관이, 복지기관이 발굴해서 전화를 하면 건강보험공단에서 "가족 아니시죠?"라는 것부터 묻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것이 문화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굉장히 많은 부분 가족에게 다 떠넘기고 있다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거환경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주거환경, 집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해야 된다 라고 했을 때 어쨌든 아픈 사람이 한 자리를 점유하고 방에 있는 상태에서 학습하지 못한다 라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또 저 같은 경우는 계속 계단이 많은 집,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계단이 많거나 하는 집에 있다 보니까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하면 집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을 계속 겪었습니다. 그런 주거환경은 장애, 탈시설 문제에서도 계속 겪는 이슈가 나오는 문제죠.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환경, 혹은 돌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또 하나는 돌봄 과정에서 내가 파산할 수도 있다. 내가 더이상 노후나 내 안전도모할 수 있는 돈을 모아놓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돌봄이 끝난 이후는 특히 급성기, 아픈 중증질환을 겪은 돌봄자들, 영 케어러들에게는 죽음이 상시적으로 가까운 상황이고 죽음 이후에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고민을 계속 하게 되는데, 사실 돌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2~3년 쓰신 분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재취업을 할 수 있을까. 이 시간을 보상받을 수 없을까 라는 고민을 자주 나누는 내용 중 하나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어려움들이 왜 발생하느냐 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발생하는 것에 어떤 함의들을 봐야 하느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구가 변화하면서 이런 경험은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저출생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나면 내 또래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동시에 내가 형제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고령화. 비혼, 만혼화의 경우는 내가 아이로서 태어나면 부모, 조부모의 나이가 나보다 많다는 의미겠죠.
그러니까 고령화 저출생 환경은 사실 필연적으로 케어의 역할이 좀 더 빨리 당도할 수 밖에 없다. 영 케어러가 출연하기에 아주 적합한 요소다. 한국의 빠른 인구 변화가 이런 문제를 가속화시킬 수 밖에 없다는 징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돌봄이라는 것이 청소년기, 청년기에 무관하다. 청소년기, 청년기는 단순히 보호받아야 하고 학습하고 원가정에서 독립하는 과정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어떻게 그 시기에 생애과업이라고 하는 것, 그 생애에 해야 되는 것들을 돌봄과 잘 어우러지게 할 수 있느냐. 생애주기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세팅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대두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래서 정상가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흐르면 안 된다는 것. 영 케어러는 아주 분명하게 ‘정상가족’, 따옴표 친 정상가족 모델의 한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영 케어러들을 가까이서 보다 보면 급성기 질환을 겪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머니가 아프거나 집에 어머니가 없는 편부 가정, 한부모 가정에서 많은 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기존에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돌봄역할을 잘 해야 된다는 성별 분업이 위기를 맞으니까 영 케어러가 출연하는 맥락이 생기거든요.
이런 ‘정상가족’ 중심, 가정 내에서 돌봄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는 이 모델의 실패를 말해주는 존재가 영 케어러이기도 하죠. 가장 큰 부분은 ‘영 케어러가 부담하는 것이 혹은 코다가 부담하는 것이 너무 힘들것 같아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왜 그렇게 하고 있는 일들이 저평가 되고 있는가’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해야 됩니다. 누구가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것에 대해서 공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고, 이전에 돌봄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나. 사회에 나가는데 손해가 되거나 불이익이 되는가에 대해서 충분하게 고민해야 되는 문제가 영케어러 문제인것 같습니다.
잠깐 이야기했었죠. 우리가 한국에서 지역사회 통합 돌봄, 커뮤니티 케어라는 말은 있는데 실체는 없는 그것과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지원하고 돌보는 행위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는 있으나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한번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 케어러는 돌봄 제공자에 대한 체계적으로 첫 번째 지원을 선언한 것에 가까운 것이거든요.
그러면 이 의미를 우리가 어디까지 견인할 수 있는가. 어떤 이슈까지. 영 케어러를 통해서 커뮤니티케어는 어떻게 가고, 비공식돌봄지원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확장시켜야 할 지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코다도 마찬가지로, 아주 많은 비율이라고 들었는데, 영 케어러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가 엄청 심각함에도 자신을 영 케어러 정체화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돌봄 경험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못하고, 또 자신이 이걸 이야기해서 차별을 겪을 것 같다. 혹은 이 역할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게 아니라는 중첩된 문제로, 정체화하지 않고 지원이 있어도 지원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현장에서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제가 마주하면서 했던 고민은 뭐냐면, 사회적으로 부를 말은 생겼고, 어떤 어떤 역할들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정의 하는 것은 효자, 효녀로 부르는 것과 얼마나 다르고 같은가. 결국 그게 나쁘게 작동하면 사회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정의 했던 역할들이 "이런 역할은 해야 돼."라는 압박으로 작동하지 않나.이런 고민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와 코다로서 하는 경험, 차별적인 경험. 저는 영 케어러가 취업하는 과정에서 불이익, 내가 혹시라도 면접관이 내가 부모를 돌본다는 것을 알아봐서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차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린시절 갑자기 선생님이 반에서 불러서 초등학생 시절에 효행상을 주면서 "부모님이 아픔에도 너는 잘 돌보는 구나." 선언하고 인정해주지만 본인은 차별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영 케어러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차별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고민도 계속 남기는 부분 같습니다.
그리고 영 케어러가 계속 영 케어러일 수 없겠죠.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진로도, 생계도, 돌봄도, 그 문제도 계속 지속되면서 나이가 계속 들어갈 겁니다. 그러면 그 나이 들어가는 케어러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고민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사실 이제 국가가 제도화 하기 위해서 실태조사를 하고 법제화 하는 과정에서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처럼 있는 질문들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 케어러가 단순히 한 집단을 지원하자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여러 이슈들을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에 한번도 논의되지 않았던 방식의 어떤 돌봄, 어떤 한 존재가 돌보는 행위를 이 사회가 어떻게 그 사람의 것으로만 두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 것이고, 영 케어러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논의할 수 있는 것. 영 케어러뿐 아니라 전생애 케어러, 전반자에 대해서 고민하고 지금 코다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혹은 비장애 형제 경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등 다양한 이슈들을 모아서 사실은 이야기할 수 있는 장으로써 활용해야 되지 단일한 인구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아직은 되어서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코다의 경험을 인식하고, 정부가 인식할 수 있었거나 인식하고 있음에도 지원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왜 한발 물러서 있는가. 이런 고민을 들게 해서 그 부분을 말씀드릴게요.
이건 그냥 대부분 다 아픈 가족이 있을 때 어떤 역할을 하고 형제를 돌보고 가계를 담당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5번과 7번에 밑줄 친 이유는 제일 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제일 소외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한번 밑줄 쳐봤습니다. 5번. 영 케어러의 정의가 모국어가 제1언어가 아닌 가족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을 위해 통역하는 역할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알코올, 약물, 도박에 의존하는 중독 문제를 겪고 있는 가족을 보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에, 작년 말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오늘 부터 시행한다는 대책을 볼게요. 조기파악, 상담지원 등은 한국이랑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3번은 가사육아 지원이 있습니다. 영 케어러 지원인데 왜 육아를 지원하나 할 텐데, 일본은 한부모가정이나 부모가 아프거나 할 때 형제를 돌보는 영 케어러가 많더라는 게 데이터로 증명돼서 형제를 돌보는 그리고 등하원, 유치원을 데려다주고 집에 같이 오고 하는 것들을 담당해주는 것을 지원하겠다. 형제돌봄의 의무를, 부양의무를 내려주겠다는 것이 3번의 목적입니다. 4번은 우리가 지금 장애인활동지원처럼 가정에 돌볼 사람이 있으면 지원시간이 줄어들잖아요. 4번은 영 케어러면 시간을 줄이지 않겠다. 다시 말하면 영 케어러는 돌봄을 하는 사람으로 상정하지 않고 서비스를 지원하겠다는 것이 4번입니다. 그런데 뭔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통역을 담당하는 일이나 중독에 대해서 중독 케어, 문제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방지하는 일에 대한 대책은 구체적으로 수립되지 않았고 왜 이 대책과정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의 사례예요. 이채림님이고, 지금은 1년이 지났으니까 이 방송이 1년 지났는데, 이채림님은 두분 다 농인 부모님 밑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급성기 영 케어러가 됐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이것저것 금융, 보험, 복지 등을, 병원 문제 등을 계속 오가면서 힘들어 하고 있는 와중에 뇌출혈 카페에 쓴 글 하나로 시사직격에 출연하게 됐다고 해요. 그런데 이채림 님이 영 케어러 문제로 자신의 경험을 단 4~5번의 방송에서 송출을 했는데 한번도 코다의 경험이 나온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왜, 왜 영 케어러 호명하기 위해서 당사자를 찾았음에도 이 경험을 정부와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는가. 이 문제를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코다코리아가 생겼기 때문에, 저도 회원이기 때문에, 코다코리아가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 되고 저의 입장에서 무엇을 더 고민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남겼던 일인것 같아요.
이채림 님은 처음부터 가감없이 자신이 겪었던 영 케어러의 경험을 잘 이야기해주시는 분인데 이것은 왜 편집되어 다루어지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이 들면서 또 이것을 방증하는 것은 저 조차도 경험을 말씀해달라고 했으면서도 이 대책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 처음에는 잘 구상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지원대책 중에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됩니다.
저는 영 케어러들을 만나고, 그것을 정부와 간담회 형태로 같이 이야기 나눌 때 행정업무의 부담이 굉장히 크게 나오는 일이었어요. 부모님이 해야 되는 행정업무, 여러 가지 행정업무들을 다 부담해야 되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고민하다 나온 것이 행정사, 변호사를 붙여주자. 그것을 같이 할 수 있는 혹은 혼자서 다 도맡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방안을 고민해보자 라고 하면서 이 대안이 나왔습니다. 이건 어쨌든 다른 영 케어러 지원책에 있는 건 아니고 한국에 특수하게 마을사업화 하면서 마을행정사와 변호사가 곳곳에 있죠. 서울에 한해서는 마을행정사나 변호사에게 행정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영 케어러 지원에 써보자. 그런데 코다가 해야 되는 모든 통역의 업무를 다 할 수는 없지만 마을행정사나 변호사가 코다의 존재를 인식하고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지원책에서. 이런 고민을 좀 남기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뒤에 같이 논의를 좀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와 돌봄 사회.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데요. 이제 가족 규모가 축소되고 형제 수가 줄어들죠. 예전에 ‘돌봄’ 하면 과거 여성들이 담당해야 되는 것이고, 아픈 사람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중장년쯤 됐을 때 고령 부모를 돌본다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관념 중 하나입니다. 중장년의 여성. 그런데 앞에서 계속 이야기한 것은 중장년만 돌보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도 돌볼 수 있다는 세대 문제를 다루었고요. 앞에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태어나서 성별이 남성인데 상황이 돌봄을 해야 된다면 돌봄을 해야죠. 이런 식으로 이제는 떠넘길 수 조차도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젠더 구분도 사라져서 모두 돌봄해야 되는 시대가 지금 한국사회의 변화하는 상이라면 차라리 이것을 돌봄사회로 가는 기회로 생각해보자. 단순히 위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모두 돌볼 수 있다. 돌봐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로 보자고 생각합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한번 천천히 잘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 케어러의 문제는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영(young)과 케어(care)가 갈등한다는 관점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영(young) 이라는 시기는 청년이라는 시기, 청소년, 뭔가 계속 생산하는 생산적인 시기이고, 도전하고 투자하고 경력을 쌓아야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소위 ‘생산가능인구’라고 부르는 것처럼 뭔가 계속 만들어내는 시기라고 본다면 돌봄은 비생산적이고, 어떤 손실을 계속 만들어내고, 손해 혹은 불이익을 겪게 되고, 경력이 단절되는 일이다 라는 두 가지의 관념이 사실은 영 케어러라는 영과 케어의 갈등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 사회를 나타내는 지표인것 같습니다.
이게 대표적이죠. ‘영 케어러는 원래 생계부양을 잘 해야 되는데 자신의 미래도 잘 꾸리지 못한다.’ 이 경험을 저도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렇게만 봐야 되는가. 이를 테면 앞에 이야기했던 영이라는 시기에, 청년이라는 시기에 집중해서 계속 이 문제를 봐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두 가지가 갈등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두가지가 갈등하는 양상.
우리가 누군가 보호하고 돌보는 일을 평가절하했던 양상은 낸시 프레이저라고 하는 정치 철학자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시작될 때 부터 그 평가절하하는 양상은 나타났다. 그래서 계속 뭔가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하려면 누눈가를 돌보거나 아이, 장애인, 노인을 돌보는 것이 재생산 활동을 업신 여겨야 하는 거죠. 이것에 계속 의존하면서도 이윤을 창줄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야만 자본주의는 유지되더라. 다만 더이상 사회 재쟁산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돌봄, 보호의 활동이 보상을 안 해주면 무너질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보상을 해주는 범주를 재조정하는 범주 투쟁 과정이 있다고 낸시 프레이저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그런 초기에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을 공장에 많이 데리고 가야 하니까 남성, 여성, 아이 할것 없이 모두를 다 데리고 와서 일을, 모두 일을 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더이상 노동자들이 출근을 계속 반복해서 잘 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아, 가정에서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구나. 재생산 혹은 생산적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를 계속 유지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로 나온게 주부화, 주부의 발명입니다. 가정주부는 발명된 거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죠. 그리고 20세기에는 그렇게 해서 조금 임금 주고 일 시키고 가정 내에서 무급으로 돌봄, 가사를 하게 했던 것이 더이상 불능하다는, 더이상 유지가 안 된다 라는 생각이 드니까 가족임금제를 발명합니다.
가족임금제는 남성의 임금의 플러스 해서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돌봄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용을 지급하겠다 라는 아이디어죠. 그런데 그조차도 안 되니까 현재 세계화된 금융 자본주의 시기에는 모두 생계부양자, 모두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가장 삶에 만연해진 재생산 관계가 맞벌이 가족, 맞벌이 부부라고 정의 내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범주 투쟁,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뭐가 생산적인 것인지. 뭐가 이 사회를 유지하는지. 이 두개가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영 케어러, 혹은 더 나아가서 코로나 19 팬데믹을 겪었던 것도 더이상 누군가를 돌보고 사회를 유지하고 누군가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도 없고 공동체가 책임지지 않는 방식으로 떠넘기는 것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코로나19는 극단적으로 공장이 멈췄지만 사람을 돌보고 대면하는 행위는 하나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생산과 재생산이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재생산 영역을 돌보고 보호하는 영역을 어떻게 다시 범주 투쟁을 할 것이냐. 이런 문제를 남기는 부분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 중에 제가 시간이 조금 압축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나만 말씀드리면 제일 마지막에 우리 삶을 어떤 비전으로 재조직할 수 있느냐. 지금 까지 조직되어 있는 방식이 아니라 보편적 부양자 모델로 하자. 모두 돌봄하고 일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 모두 일하는 게 한국사회에서는 통용되는 사고 방식인데 모두가 일정 정도 돌봄을 부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설령 가정 내에서 돌봄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중요한 생계의 위치에 있더라도 혹은 이 돌봄을 당연히 해야 되는 위치에 있더라도 그 돌봄을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위치, 예를 들어 가정주부도 돌봄을 줄여야 하고 일을 해도 돌봄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는 돌봄을 모두 참여하는 시공간이다. 모두 참여해야 된다는 관계라는 것이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의 아이디어입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느냐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떤 사회의 모습으로 가야 하느냐를 언급하는데요.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읽어볼게요.
모든 일자리는 돌봄 제공자인 동시에 노동자인 사람들을 위한 방식으로 고안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상근직보다 지금의 상근직보다 주중 노동시간이 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취업 가능케 하는 서비스를 받게 될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어떤 일과 돌봄의 위계를 사라지게 만들고 한 사람이 충분히 자기 자신도 돌보고 타인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성의 중심, 누군가는 돌보고, 누군가는 돌보지 않는 이성의 중심의 핵가족일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가족과 타인을 돌보는 경계도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활동들이 가능한 것이 보편적인 돌봄 제공자 모델이라는 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될 사회상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영 케어러에 대해서 연구했던 키고야 도모코가 했던 이야기인데요. 단적으로 얘기하면, 이 사회에서 계속 능력 있는 사람이 중요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말하는데 나는 계속 나에게 의존하는 할머니, 아픈 할머니가 그러면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라는 이야기를 영 케어러가 직접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능력주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몫을 충분히 가져가야 한다는 한국에서 주로 이야기되고 있는 능력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는 문제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능력주의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능력주의는 어떤 인간의 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계속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어쨌든 서로가 어떤 방식으로든 의존하면서 살아왔고, 함께 섰고, 앞으로 계속 의존할 것이고, 누군가의 의존에 보답, 응답해야 되는 관계 속에 계속 있는데 이 능력주의, 특히 한국에서 말하는 한국의 능력주의적 사고 방식은 그렇게 지속해왔던 인간의 본래 모습을 부정하는 방식. 마치 모든 것이 한 출발선에 선 내가 다 얻어낸 것이고 그 능력의 원천은 내가 의존했던 관계들, 자원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 노력뿐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존재해왔고 이 사회가 유지되어왔던 의존하고 돌보고 보호해왔던 그 관계들에 대해서 우리가 저평가 하게 되는 또 우리가 해왔던 역할에 대해서도, 받았던 것에 대해서도 저평가하게 되는 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불평등을 고민할 때 굉장히 어떤 부분, 어떤 영역을 추가해서 고민할 것인가.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정동적 평등〉이라는 책입니다. 어떤 평등이냐라는 것을 주로 이야기 나누려고 하는데요. 평등과 불평등을 우리가 주로 이야기할 때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이 자원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논의할 때 보통 경제 영역,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을 많이 이야기하죠. 또 하나는 정치적으로 나를 대표해줄 수 있느냐. 혹은 정치적 참여 하는 어떤 참여할 수 있느냐 라는 것에 정치 영역에서도 평등, 불평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회문화적으로도 나를 위한 인프라가 조성되어 있느냐. 나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환경에 놓여 있지 않느냐. 이런 것들로 우리는 평등, 불평등을 계속 파악하죠. 이 책은 거기에서 더 나가서, 우리는 더 나아간다면 경제, 정치, 사회문화가 어떻게 엮이는지 이야기하는데 정동적인 측면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정동적인 측면은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정동은 이 책에서 사랑과 돌봄과 연대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1차적 돌봄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누구나 대체 불가능한 친밀성을 공유하는 관계가 있어야 된다. 그렇게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봄관계를 볼까요? 2차적인 돌봄관계는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이웃이나 동료간에 서로 도움을 주고 받거나 배려하거나 인정하거나 혹은 돌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 관계. 더 나아가서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로서의 관계. 우리는 활동지원이나 요양보호사 다 사실은 면대면으로 관계를 맺는 거죠. 물화되어서 서비스로 존재되는 게 아니죠. 이것을 2차적 돌봄관계라고 이 책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연대의 관계. 3차적 돌봄 관계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내 입장을 대표해줄 수 있는 행정기관이 있느냐. 혹은 내가 나를 대표해주는 시민단체나 연대해주는 연대체제가 있느냐 라는 것이 정동적으로 평등해지는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관계가 이 세 가지다.
도표로 보면, 이 책을 나중에 읽어보시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도표를 제시합니다. 이런 나이테 같은 느낌으로 한 사람에게 이런 관계들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리하자면, 정동적 평등은 모두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돌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하는 삶이 고르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지금 까지 돌봄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이 책을 소개시켜드린 이유는 뭐냐면, 기존에 돌봄이라는 것은 돌봄 받는 사람을 너무 수동적으로만 보고 돌봄 받는 사람, 수혜자, 돌봄 수혜자를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지 않는 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돌봄이라는 말이 시혜적이고 사적이고 여러 가지 문제시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장애계에서는 그 부분들을 대체하기 위해서 활동을 지원한다는 말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의 저도 돌봄을 이야기하고 돌봄 논의에서는 돌봄이라는 것 자체를 사람이 당연히 의존하면서 살아오는 것, 모든 사람이 의외없이 돌봄 수혜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어떻게 돌봄 제공하더라도 돌봄을 수혜하더라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관계 안에서 평등할 수 있느냐 라는 논의로 요즘 흐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자신의 방법론을 돌봄 대화 방법론이라고 설명합니다.
돌봄을 이야기할 때 조차 돌봄 제공자, 돌봄 수혜자가 모두 참여하는 대화가 되어야 우리는 그 순간 조차도 정동적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이 책은 이야기하는데요. 우리가 돌봄제공자라고 이야기하는 게 돌봄 수혜자를 소외시키지 않고 돌봄 수혜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돌봄 제공자와 어떻게 연대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는 바로 이 정동적 평의 논의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나 조차도, 저 조차도, 지금 나에게 사랑관계가 있나? 돌봄관계가 잘 조성되어 있나? 내가 취약해질 때 내 입장을 대표해줄 수 있는 연대할 수 있는 행정기관, 제도, 시민단체가 있는가? 라는 고민을 남긴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 돌봄이라는 것이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또 평등 상태로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어떤 장이다 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 영 케어러에 대한 논의와 그리고 또 영 케어러담론과 코다 담론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지. 정부가 주도하는 영 케어러 지원대책에 코다 지원대책은 왜 빠져 있고 영 케어러 안에 코다 이야기는 왜 같이 가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 부분은 코댜당사자 뿐 아니라 코다 코리아에서 논의하면서 어떻게 정책적으로 풀 수 있을지 이제부터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오늘 그래서 이 자리에 조기현 작가님을 모신 것은, 저도 제가 기억하기로는 코다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 알려질 때쯤 영 케어러라는 담론이 한국사회에 알려지고, 조기현이라는 사람을 영 케어러 당사자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부의 청년 지원 대책에 영 케어러가 잘 맞아떨어지면서 영 케어러가 수면 위로, 뉴스에도 많이냐오고 정부관계자들이 지원해야 된다고 하면서 정책적으로 갑자기 지원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 그러면 코다도 당연히 힘들고, 코다도 영 케어러와 정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코다도 영 케어러인데, 급성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가 쓰려져서 24시간 돌보는 문제는 아니지만 정말 어렸을 때 부터 일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본에는 영 케어러 논의에 모국어가 한국어죠. 한국어가 제1언어가 아닌 그래서 통역 의무가 있는 당사자들을 영 케어러라고 합쳐서 부르는데, 그걸 코다라고 부르고. 이주민들의 자녀도 그 케이스겠죠. 부모는 방글라데시어나 몽골말을 쓰지만 집 밖에서 한국말을 사용해서 부모와의 소통을 자신이 통역사로서 담당해야 되는 이주 아동들도 영 케어러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코다와도 똑같은 경험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 논의를 어떻게 같이 가져갈 수 있을까 라는 저의 고민에서 이 강연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대담을, 강연을 준비하면서 조기현 작가님의 두 책을 읽고 시부야 돈모코, 일본의 영 케어러를 조사한 연구자의 책을 읽으면서 코다 담론과 영 케어러 담론이 정말 필연적으로 같이 갈 수 밖에 없다 라고 저는 느껴졌는데요. 그리고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조기현 작가님의 책을 읽고, 조기현 작가님은 코다에 관한 책을 읽으셨을 텐데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도 궁금하고 보호자가 되는 케어의 경험, 보호자가 되어 케어되는 경험들이 똑같다고 느껴졌는데, 전반적으로 코다에 관한 이야기들과 칼럼들을 읽으셨을 텐데, 읽으시면서 어땠는지도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조기현: 작년에 거의 11월, 12월, 1월 동안 대책을 마련했던 시기여서, 좀 더 빨리 코다코리아를 만났으면 조금 더 이 문제를 영 케어러 안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 어떻게 제도화 할 수 있느냐를 적극적으로 논의했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건 영 케어러 지원대책 안에서 다뤄야 할만한 것들을 이번에 코다코리아 강연을 준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뒤늦었다고 말하기에는 이제 막 영 케어러 지원도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경험이 지금 이길보라 대표님 말씀처럼 기존에 코다의 시선으로 있는 사회 현안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볼 수 있구나 라고 읽다가 코다에 대해서 집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 경험들을 가지고 그 경험을 어떻게 사회적 대책 안에서 같이 논의될 수 있느냐 라는 것을 빨리 깨달았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누군가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것. 돌봄이라는 말을 법제화 할텐데요. 질병과 장애가 아닌 취약함, 이를테면 이주민의 자녀로서 수행해야 되는 어떤 번역의 일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지금 법률용어로 돌봄 정의 한 것은 하나도 없거든요. 대부분 서비스로서의 요양을 말하고요. 그러면 정말 급진적인 돌봄의 개념이 나올 수 있죠. 취약함 자체를 볼 수 있으니까. 한국 사회는 취약점에 대해서 지원하려고 하면 장애진단서 떼어와라. 질병진단서 떼어와라. 이런 식으로 취약점을 장애와 질병, 의료화 된 구체적인 명에 기대고 있는데요. 그게 아니라 취약함 자체에 주목할 수 있는 개념을 앞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코다, 그리고 미등록 이주아동의 경험을 겹쳐보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길보라: 말씀 들으면서 저희 코다코리아가 계속 해왔던 활동이 코다가 장애 부모아래에서, 그러니까 농인 부모 아래에서 나고 자라면서 물론 통역을 해야 되는 부담과 그리고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통역을 하고 부모를 보살펴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들을 하긴 하지만 동시에 코다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긍정적 경험 또한 있는데요. 예를 들어 수어를 잘할 수 있거나 혹은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거나 두 사회를 효율적으로 잇는 사람이 되거나 하는 방식의 긍정적 경험이 있는데, 사실 이건 거의 한국 사회에 알려지지 않고 부모가 말을 못하는 구나. 불쌍하다. 안타깝다. 그런 시선으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코다코리아의 활동과 개별 코다들은 계속해서 그게 아니다. 이 경험은 결국 다른 문화에 관한 것이고, 장애이긴 하지만 결국 다른 문화인 것이고, 그 다른 문화에서 빚어지는 차이들에 집중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그래서 우리만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계속 하다 보니까 그런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 그건 영 케어러 담론도 그런 고민들을 하실것 같아요. 영 케어러 역시 돌봄을 하면서, 나는 이 시간을 제대로 보상받고 있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취업준비할 때 그 시간을 충분히 쓰지 못하고 나는 엄마, 아빠를 보살피고 있어.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경험들을 하지만 또 동시에 그 경험이 사실 나쁜 것, 좋지 않은 것으로 100% 환원되는 것은 아닌 거잖아요. 그 경험이 사실은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회를 다르게 볼 수 있는 경험이 되는데, 코다로서의 긍정적인 경험들, 돌봄의 경험들을 긍정적으로 알리는 활동들을 주로 해왔기 때문에 코다 이슈를 정책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자체는 코다코리아에서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저희는 이 영 케어러 이슈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조기현: 영 케어러 모임을 하면서 급성이나 조현병 혹은 인지저하(치매) 가족들 영 케어러들을 만난 경험이라면 오히려 저는 사는데 있어서 그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지 않을 수 없고 사실은 슬프고 상실감을 느낄 만큼이나 기쁨도 혹은 그 일을 수행한 것에 대한 보람도 계속 느끼는데 다들 그 기쁨과 보람 혹은 배움 같은 것들을 계속 억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영 케어러 자조모임을 할 때는 정말 온갖 부정적인 것. 며칠 털어놓으면 부정적인 것이 쌓여 있는 것을 헤집으면서 긍정적인 요소들을 하나씩 찾아보는 거죠. 그렇게 찾으니까 온몸으로 파르르 하면서 이 경험이 완전히 재해석 되는 거예요. 그 시간을 이제 막 겪고 있는 것 같아요. 긍정적인 요소들을 우리가 해낸 것, 왜냐하면 못해낸 것이 계속 생각나고 죄책감이 들고 돌봄자로서 좋은 돌봄자도 아닌데 사회적으로 핍박받고 억울하고 이런 마음이 굉장히 크면 이런 경험들을 다시 하는데 까지 힘을 길러내는, 같이 하는 시간들이 많이 필요한것 같아서 애초에 그것을 발견하는 시간이 시차가 많이 드니까 오히려 사회적으로 뭘 해야 되느냐도 계속 고민하면서 긍정적인 요소들, 이 경험속에 분명 있지만 우리가 발견해내지 않았거나 사회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을 발견하는 관계의 시간들도 길었던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이 경험들을 코다코리아가 했던 경험이 어쩌면 시작점으로 가장 필요한 경험 같아요. 긍정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회적 지원 가야 하지. 그 방향을 긍정적인 요소를 죽이는 방향으로 사회가 개입하면 안 되잖아요.
영 케어러는 그런 경계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사회가 어떻게 긍정적인 요소를 극대화할 것인지. 그뿐 아니라 한 개인에게만, 그룹에게 놔두는 게 아니라 사회 전역으로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 그래서 영 케어러와 코다의 집단, 혹은 당사자들이 서로의 참조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미등록 이주아동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최근에 은유 작가님이 쓰신 미등록 이주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아까 말씀해주셨듯이, 저도 이야기했듯이, 부모가 이주해서 노동을 하는데, 부모가 체류자격이 없어서 아이또한 체류 자격이 없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어렸을 때 부터 한국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어를 잘 하고 한국어를 잘 하는데 국적은 이 나라에 등록되지 않아서 신분증이 없어서 사회에서 애로사항을 겪는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 아동들을 이야기를 읽는데, 그 이야기가 코다의 경험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부모를 위한 통역을 하거나 부모가 아직 이 사회에 동화, 말, 언어소통이 안 되니까 굉장히 많은 상황에서 부모를 통역하거나 하는 것을 보면서 미등록 아동의 경험이, 다문화 경험이 코다와 똑같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 책에는 미등록 이주아동이면서 동시에 코다인 케이스도 나오거든요. 아까 영 케어러이면서 코다의 경험을 한 영 케어러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미등록 이주아동과 코다, 영 케어러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미등록 이주아동이면서 코다, 영 케어러이면서 코다, 미등록이주 역시 영 케어러안에 포함되는 거죠. 이런 어떤 담론들을 우리가 계속 연결할 필요가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이것에 대해서 제가 지난 번에 조기현 작가님과 이야기할 때 조기현 작가님이 이것을 이렇게 보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런 이야기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조기현: 네. 제가 그래서 영 케어러 논의가 더 뭔가 몇살, 누구,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정의 내리는 건 정부가 해야 될 역할이고, 우리가 의논해야 될 것은 ‘이것도 영 케어러잖아. 어린 나이에 돌봄하고 있잖아.’ 이런 것을 계속 끄집어낼 수 있는 저수지, 장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영 케어러를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등록 이주 아동들도 "영 케어러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던 정동적 평등의 상태. 우리가 지금 한국이라는 공동체에서는 일정 정도 정동적으로 친밀성으로 끈끈한 1차적 관계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나에게 돌봄이나 보호를 해주는 사회제도, 이웃의 관계가 있을 수 있고 더 넓게는 내가 취약한 상태가 됐을 때 연대해주는 행정기관, 다른 관계가 있을 수 있는데 이주 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세 가지의 모든 관계를 한번에 박탈하는 거잖아요. 다른 영토에 아예 가서 세 가지를 박탈하는 거여서 정동적 불평등, 돌봄이라는 말을 정동적 돌봄이라는 말로 바꿔서 정동적 평등, 좋은 돌봄은 정동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돌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유기적이어야 돌봄이 가능한데, 이렇게 되면 이주아동도 그렇고, 미등록 이주 아동이 통번역을 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려고 했던 부모님도 그렇고 둘 다 정동적 불평등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냐. 단순히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혹은 사회적 약자로서 취약한 사람이 아니라 이 관계들이 어떻게 박탈되느냐. 혹은 이 사회 내에서 미등록 이주 아동이라는 것을 연대하는 단위가 행정기관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 관계들이 박탈되어 있느냐. 한국사회에서. 이런 것을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보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도 미등록 이주 아동과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지를 논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눴던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네. 그리고 지난 번에 오늘의 대담을 위해서 사전미팅을 미리 했었는데요. 그때 2인칭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도 잘 모르는 개념이어서 이후에 논문을 언급하신 눈문을 찾아봤는데, 2인칭의 윤리라는 부분이 영 케어러 당사자, 코다에게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논의들일것 같은데 영 케어러, 코다가 겪는 2인칭의 윤리가 무엇이고, 그게 영 케어러와 코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그래서 우리는 어떤 논의들을 해나가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기현: 네. 제가 원래 약간 강의 할 때는 이렇게 사적인 대화를 할 때 개념을 남발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길보라 대표님이 남발한 것들을 다 잡아서 잘 정리, 얘기하라고 해주셔서 한번 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제가 2인칭 관점의 윤리라고 하는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논문에서 만났냐면 「현장에서 2인칭 관점 윤리의 구현과 지속」이라는 조그만 소논문이었어요. 노들 장애인 야학의 활동가와 장애 당사자간의 관계를 참여관찰을 하고 쓴 건데요. 2인칭 윤리 관점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아! 이거지.' 윤리가 내가 수행하는 윤리, 혹은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해야 돼. 사회적 약자야.' 이렇게 정의 내린 3인칭의 윤리가 아니라 관계 내에서 파생되는 윤리가 있고, 그리고 어떤 관계에 응답하는 것이 윤리인 경우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아요. 말하자면 3인칭 윤리는 이 사람은 장애인이고, 이 사람은 이주아동이고, 이렇게 어떤 정책성에 기반해서 이야기하고 아주 보편적, 공동체 전반의 윤리를 고민하게 하는 윤리관점이라고 한다면 1인칭 윤리는 주체가 어떻게 윤리적으로 실천할 수 있느냐. 삶 자체가 다 주체적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논문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2인칭의 윤리는 윤리가 관계 안에서 파생될 수 밖에 없고 그리고 관계라는 것은 계속 지속적인 협상, 갈등, 여러 가지 고민들을 내재할 수 밖에 없다. 그 안에서 계속 내가 농인 부모와 나의 입장을 계속 갈등하면서, 내가 지금 아픈, 인지가 저하된 아버지와 나의 입장이 계속 갈등하면서 생겨나는 윤리 관계가 2인칭의 윤리이고 그 가능성은 내가 내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돌봄을 제공하는 부모의 입장, 제공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 사회에 대표하는 역할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개념 같아요.
실제로 농인 부모가 차별없이 살 수 있다면 코다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고, 많은 영 케어러들은 만나자마자 영 케어러로서의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거든요. ‘내가 돌보는 사람에게 이런 게 제공하지 않아요. 이 사회가 이런 것을 배제해요.’ 라는 것을 말해요. 애초에 움직여야 하는 것은 그런 부분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코다도, 영 케어러도 그렇고 2인칭 윤리의 담지자인 거지. 윤리라는 것은 완전히 소거하고 모든 것을 의무로 만드는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된다는 관점과도 대치되는 거죠. 가족이니까 당연히 돌봄해야 되고 네가 해야 된다는 역할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계속 파악되고 고민되고 지속되는 갈등과 협상으로 만들어지는 그 윤리적 실천 그 자체라는 것을 2인칭 관점의 윤리 개념이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코다가 특히 듣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농인 부모가 겪었던 경험을 내가 다른 방식으로 더 가시화 하거나 대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길보라 대표님의 칼럼을 봤는데, 그것도 2인칭 윤리 관점을 고민하는데 핵심적인 것 같아요. 듣는 권력이 있다면 활용한다면 이 공동체가 나아지는데 있어서 배제되고 차별되지 않는데 써야지. 이런 고민들을 다른 차원으로, 가족 테두리를 넘어서 다른 차원으로 고민하게 해주는 방법 같고 영 케어러 논의를 하면 항상 영 케어러의 권익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사회 습관을 깨버리는 것. 당연히 돌보는 사람의 권리를 생각하는 위치에 있는 건데 사회적으로 설득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관점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고 이렇게 남발하는 관점을 한번 정리할 수 있게 질문을 주셔서 제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이길보라: 이 개념 자체가 저도 처음 듣는 개념이어서 그 개념 자체에 대한 개념을 영 케어러와 코다 입장에서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다음 논의는 제가 단체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인데요. 영 케어러 경험들을 계속해서 풀어내는 일들을 하셨고, 이 경험 세계를 공유하는 일들을 해오셨는데 이건 코다코리아가 계속 해온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면서 코다에 대한 경험들을 계속 공유했고, 또 코다코리아의 활동가들과 함께 연구활동가들과 함께 '우리는 코다입니다'라는 책을 쓰면서 코다의 경험을 한국사회에 알리는, 경험세계를 알리는 일을 해왔는데요. 그런 저희가 그런 작업을 했던 이유가 코다의 경험을 알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 기초 자료가 나와야 이후에 코다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진행되고 더 많은 콘텐츠도 제작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코다 문제 해결을 위한, 동시에 농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들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하고 그런 활동을 먼저 해왔는데요.
물론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지만, 단번에 저희가 그런 책을 썼다고 바로 사회문제가 해결되고 코다 문제 끝 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죠. 사실 영 케어러 담론을 보면, 예상보다 빨리 정책적으로 빨리 영 케어러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해결 방식으로 먼저 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 케어러 담론을 봤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리고 동시에 영 케어러 당사자로서 개인적인 고민도 있었을 텐데, 단체 설립을 할까말까 하다가 아직은 하지 않고, 정부 정책, 영 케어러 관련한 정부 정책 만드는데 여러 가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실질적인 정책의 논의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시는데요. 이 운동의 방향과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과 소회도 있을것 같아요.
조기현: 말씀하신 대로 작년에 정부에 이슈도 더 강하게 이야기하고, 협상하고 할 수 있는 파트너 역할로서 이끌어가기 위해서 단체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계속 했다가 그당시에 아직까지도 그 당시에 왜 주저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에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영 케어러 문제는 영 케어러라는 단일집단만 대표해서 풀 수 없는 문제라는 문제의식이 저한테는 가장 크게 동기를 말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만약 제가 한국에 이런 단체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다 관장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다면 시민단체는 영국의 케어러스 UK라는 단체의 형태가 가장 적합한것 같다. 그것은 영국의 돌봄자 전반, 아픈 가족,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돌보는 돌봄자 전반에 대한 지원을 하는 전국 조직이에요. 전국 연합체 조직이고. 원래 작은 단체들이 모여서 전국 조직으로 현장 상담도 하고, 실제 이슈파이팅도 하고, 그래서 돌봄자 수당 같은 것, 적은 금액이라도 한달에 40만원 정도의 수당을 쟁취하고 그리고 케어러 액터를 통해서 비공식 돌봄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이념을 가진 일가정 양립정책, 수당정책들을 시행하게 만드는 단체가 있는데 한국에는 케어러스 KR, 돌봄자 연합 이런 식으로 전반적으로 돌봄 행위의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조직이 지금 가장 필요한 시점 같다. 그런 조직들이 계속 뭔가 없으니까 당사자 조직이 돌봄에 한해서는 돌봄을 제공하는데 한해서는 당사자 조직이 없으니까 커뮤니티 케어, 비공식 돌봄이 미비 할 수 밖에 없어요.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대표하는 말을 못 하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영 케어러, 저도 영 케어러 간담회 하면 마음이 힘들어요. 왜냐하면 사실 그런 게 아닌 데도 나쁜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만 해야 되니까.
분명히 이건 하나의 삶이고, 사회문제로 설정되기 전에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이것은 내가 사는 삶의 어떤 태도들을 만들었고 내 정체성을 만든 중요하고 고유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문제로 설정하고 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거든요. 그것을 저는 어쨌든 참고 납작해지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계속 하면서 어쨌든 빨리 시급하게 정책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곧 대선시기가 되면서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납작해지기를 어느 정도 전략적으로 택했던 것 같아요.
코다의 경험을 긍정적인 요소를 공유한다는 것은 납작해지기 전략이 아니라 두터운 경험 세계를 이 사회에 느리지만 깊게 인식하고 그것들에서 더 사실 더 자라날 수 있는 환경들을 만드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저도 그런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새파란 돌봄 낸 것도 납작해지는 경험을 보완하기 위해서 어쨌든 단순히 효자, 효녀가 아니라 영 케어러라는 구호로 만들었던 것에 대해서 빨리 시행할 수 있는 것과 이후에 사실은 돌보는 삶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략을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와중이고 그래서 참조점이 많은것 같아요. 저도 〈우리는 코다입니다〉라는 책을 영 케어러 당사자들이 냈으면 좋겠고, 더 풍부한 경험들을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그게 지금 시즌에는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 케어러 지원책을 만들어도 또 다른 이름으로 효자, 효녀를 부르고 가족체계를 강화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사회가 더이상 납작하게 누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라고 계속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그게 아마 발굴되지 않은 코다들. 발굴되지 않은 영 케어러들을 어떻게 찾아낼 것이냐. 정부가 지원한다고 해결되지 않잖아요. 그랬을 때 코다라고 커밍아웃하고, 영 케어러들이 나는 영 케어러였어 라고 말하는. 정부가 돈을 준다고 코다 당사자, 혹은 영 케어러 당사자들이 당사자로서의 자존감을 가질 수 있을리 만무하잖아요. 그래서 말씀하셨던 두터운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우리가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 여기에는 아까 말씀하셨듯이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참고 납작해지더라도 얘기해야 된다.’ 당연히 어떤 방송에서 기회가 있다면 코다로서의 경험들을 다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방송에서는 참고 납작해지고, 작게 이야기되더라도 어쨌든 효율적인 방식을 택하는 그런 고민들을 저희도 하고 있는데요. 저희도 고민을 같이 하고 있어서 코다, 영 케어러도 두터운 삶의 경험들을 느리지만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결국 오늘 말씀하셨던 이야기들이 케어, 돌봄, 영 케어러와 코다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돌봄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저희는 코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코다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농인의 문제를 해결해야 코다가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희도 항상 코다가 겪는 어려움이 뭐냐고 하면 농인이 겪는 어려움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 하는데, 영 케어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영 케어러와 코다 문제를 푼다는 것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 구조를 바꾸고 돌봄이 부재한 사회를 바꾸는 것. 보편적 돌봄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어떤 보편적 돌봄이 있는, 그리고 어떤 돌봄 민주주의 사회로 우리가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결국 연결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기현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장애인 중심주의 혹은 건강 중심주의, 아픔, 장애가 계속 예외적이고 우리한테 마치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상상하는 것 자체를 바꾸지 않는 다면 계속 영 케어러로 인정해달라, 코다 경험이 이렇게 라는 것이 전체적인 구조를 바꾸는데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치열하게 더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 케어러 탈시설 문제, 장애인 탈시설 문제처럼 지역사회에서 장애가 있더라도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은 돌봄 제공자 입장에서도 내가 고립되어 돌봄하지 않는 것. 다양한 서비스 주체들과 협력해서 잘 돌봄을 해나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역사회 통합돌봄, 장애인 탈시설,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 입원’이라고 하죠. 급성기 질환을 겪고, 그것들을 가족이 감당을 못하고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 이런 것들이 다 연결되어 고민하지 않으면 이 이슈들이 연결되어 있고,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는데 있어서는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결하는 언어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자리가 그 시작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질병을 돌보는 논의와 장애 부모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잘 연결이 안 됐거든요. 저도 신기하게 영 케어러 많이 하는데 장애가 있는 부모의 영 케어러는 만난 적이 많이 없어요. 한번 있어요. 왜 그럴까 이런 고민을 했어요. 장기요양을 받는 경험은 많은데, 장애 경험은. 그래서 어떤 생각을 했냐면, 장애 등록이 되면 영 케어러 지원이 있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건 아니고, 담론이나 실제 사회 현장에서 왜 이렇게 잘 접점을 못 맞출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 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코다코리아가 해야 되는 일들이 어떤 돌봄 사회를 만들 것인가 라는 의제와 잘 연결시키는 일들을 우리가 해나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또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대담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남은 시간이 한 10~15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혹시 질문 있으신 분은 손을 들고 질문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지금 김상화 님께서 좋은 강의 해주신 조기현 작가님께 감사드린다고 채팅 남겨드렸는데, 저는 코다에 대한 생각으로 부터 영 케어러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무지한 상황에서 질문드린다고 하셨습니다.
김상화 : 코다는 긍정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아왔는데, 코다와 다른 영 케어러는 부정적인 측면과 정부지원에 관한 것이 더 부각되어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영케어러의 긍정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례가 있을까요? 그러면 저의 무지가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기현: 일단은 긍정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을 말하자면,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프고 내 돌봄을 하고 있다는 것을 편견없이 말할 수 있는 어떤 환경이 문화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돌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스스로도 많은 부분 그렇게 평가해요. 위기해결능력이 뛰어나졌고 누군가의 감정을 읽거나 상황이나 상태를 읽는데 있어서 뭔가 남들보다 잘 하는 것 같다. 어떤 역할들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좀 더 능숙하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이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리고 누군가 약간 그런 돌봄이나 취약한 환경에 있을 때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한국에 있는 영 케어러 연구자, 책 시부야 도모코의 책에서 마지막에 영 케어러 해결책은 영 케어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 만들기가 해결책이거든요. 긍정적인 요소와 문화적인 요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한편, 또 한편으로 안전하게 만드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커뮤니티 케어, 여러 가지 지원이나 지역사회 돌봄이나 혹은 장애가 있거나 아픈 당사자에 대한 지원이 있는 상태에서 해야 되는데 지금은 영 케어러들이 아무런 지원없이 자기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긍정적인 말하기, 공간에 대해서 쉽게 말하기는 저도 심적부담이 큰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넉넉한 사회적인 돌봄 서비스가 제공되는 와중에 그런 이야기를, 그런 게 가능한데, 실제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저도 자조모임 내에서 어떻게 할지 이런 고민들을 계속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종국에는 돌봄이 우리가 어떻게 긍정적인 측면들로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한 요소인지. 돌봄이 이것을 설명해야 돌봄사회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계속 고민하게 되는 부분 같습니다.
이길보라: 네. 그 부분은 코다에게도 마찬가지 같아요. 다른 코다들을 만나면서 자기 삶의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그것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시공간이 생겼을 때 비로소 이게 긍정적인 경험이었네? 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차후에 조금씩 생기거든요. 그런 시공간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수 있을까. 그게 영 케어러와 코다의 몫인가. 사회가 같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질문이 채팅으로 하나 올라왔는데, 혹시 손을 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까요? 황지성 님은 박수를 치면서 손을 드셨는데, 질문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지성: 안녕하세요. 저도 코다코리아 회원이고요. 황지성이라고 합니다. 저도 코다이기도 하고, 지금 장애와 돌봄에 대해서 사실 연구논문을 하고 있어서 되게 많은 기대를 하고 오늘 참여했는데요. 역시나 제가 돌봄에 대해서 연구를 했지만 영 케어러 담론이 한국에서 너무 최신의 담론이어서 아직 이것까지는 제가 볼 생각을 못 한것 같은데요. 오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소위 말해서 전통적인 돌봄 논의와 되게 결코 떨어뜨릴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던것 같고, 유용한 개념들과 아이디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코다와 영 케어러 이런 부분은 앞에서 대담을 통해서 이길보라님과 다른 분들도 많이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그냥 영 케어러에 집중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영 케어러 가지고 정부와 많이 이야기하셨다고 하셨는데, 저는 정부와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게 너무 짐작되는 거죠. 한국에서 장애와 돌봄의 역사를 봤을 때 정말 장애인 부모님 아래에서 산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진짜 서바이버다 라고 할 정도로 장애에 대한 돌봄 체계가 없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생존자가 아닌가 할 정도로 너무 없는데, 청년 정책에 들어갈 것 같아요. 돌봄정책이 아니라. 그렇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게 돌봄이지만 동시에 또 청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캐치하는 게 빠를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정부가 어떤 복지를 한다고 했을 때 엄청나게 뭔가 대단한 것을 꺼내주는 것처럼 하면서 좁게 범주 설정하고 지원의 근거를 되게 합리적인 근거를 끄집어내려고 이런 것들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영 케어러 관련해서 나온 구체적인 지원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그것과 관련해서 싸우실 때 너무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돌봄에 대해서 투쟁한 것에 오랜 역사에 비하면 쉽게, 그냥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라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고요. 그런 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그다음에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영 케어러라는 단일집단, 소수의 집단, 특정집단이 아니라 넓은 어떤 돌봄 패러다임을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시겠다고 하시는 거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합니다만, 계속 정부와 만나면 점점 납작해져야 하고, 그나마 소수집단이라도 정부가 주겠다고 하는 것마저 혹시나 뺏겨 버릴 수 있는 위험까지 있는 그정도로 한국정부가 돌봄에 대해서 진짜로 태도가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런 걱정까지 든다는 거죠.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하시는 부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기현 : 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주셨네요. 저는 근데 약간 제가 단체가 없잖아요. 단체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어떤 마음이었냐면, 일단 띄우자. 어쨌든 얘기라도 되게 하자. 제가 장애인계에서 투쟁하는 것처럼 법률안을 만들고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 까지 가지 않았잖아요. 지금 논의가 막 시작됐으니까. 진짜 힘든 것은 그때부터 일 것 같고. 현재는 실태조사 하겠다 까지 와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존재가 있고, 어떻게 방향이 설정될지도 고민해야 되지만 청소년, 청년들이 부담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 만으로도 일보진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이후의 미션들은, 대신 좀 계속 중간에서 정부가 설득될 수 있을 만한 언어들을 위원회 테이블에서 쓰면서 동시에 나는 그걸 전체 그림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나.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너무 납작하게 말할 수 밖에 없고, 근거들을 바로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이야기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이를 테면 미등록 이주 아동, 대부분 등록이 됐다고 해도 통역의 일은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어쨌든 이주 배경의 아동이 만약 영 케어러와 돌봄이라고 설정한다면 이 돌봄이 어떻게 힘든지 강조하겠죠. 저는 뒤에서 담론적 층위에서는 이런 고민을 하겠죠. 더이상 질병, 장애로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취약함 자체로 확장되는 시발점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이런 전체 그림을 정부가 하는 게 다가 아니라 민간 영역에서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 움직임들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지금도 기아대책, 생명의 전화 등에서 영 케어러 어떻게 지원할지. 해보고 싶다. 각자의 노하우가 활용되는 거예요.
생명의 전화는 자살, 심리상담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설계하고, 초록어린이재단은 커뮤니티 케어 안에서 아동, 그리고 학교라는 것을 어떻게 다루느냐. 이것에 대해서 전문성을 가진 아동보호전문 관점에서 다루고, 기아대책도 이전부터 계속 그런 자활 2세대가 수급자 가정을 지원하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경험을 영 케어러에서 어떻게 풀어낼까를 고민하거든요. 당연히 기부금 재단들이 보이기식도 있고, 그 안에서 한두명의 실무자가 열심히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민간에서 잘하면 언제 정부지원사업이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여러 가지 기대를 두고 여러 가지 네트워크들에 협력 하는 중이다. 그 정도로 지금은 제 역할 혹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답이 됐을까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어서 충분하게 답을 못한 것 같지만 좀 더 제대로 뭔가 답이 안 됐다면 더 질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지성: 아닙니다. 밤새서 이야기해야 될것 같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길보라: 네. 이 논의들은 황지성 선생님은 '우리는 코다입니다'라는 책을 같이 쓰기도 하셨고, 논문을 현재 쓰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가 같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멘트로 김현성 선생님께서 일하느라 늦게 참여해서 앞의 강의를 못 들어서 아쉽다고 했는데 유튜브로 나중에 풀로 공개할 것이기 때문에 놓친 것들은 열심히 들으시면 좋겠고요.
질문은 영 케어러와 코다에 대해서 정부, 지방정부 차원에서 어떤 지원이 있으면 좋을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해야 할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짧게 대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조기현 : 네. 사실 지원이란 게 따로 없다고 해야 할까요. 이미 있는 지원을 못 받고 있다는 문제 의식으로 발굴하고 연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요. 그리고 영 케어러, 코다 지원은 아니지만, 아까 설명드렸던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복지부와 시범 사업을 하고 있는데 행정사와 변호사를 붙여서 어린 나이에 행정 업무의 부담을 줄이겠다고 사업하고 있는데, 마을 행정사나 변호사가 코다, 영 케어러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얼마만큼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을 활용해서 지원할 수 있느냐 라는 문제를 앞으로 고민해봐야 될 것 같다. 어떤 지원이 딱 있다고 하기에는 발굴하고 기존의 복지 서비스들을 연계하겠다는 것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지자체의 기사를 보면 여기저기마다 뭘 하겠다고 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들여다 보면 영 케어러를 발굴하겠다. 이 이상은 못 간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코다 같은 경우는 코다들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코다에게 주어진 통역의 의무나 이런 것들을 통역의 의무를 코다들이 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학교든, 정부 기관에서든 사회적인 어떤 통역 체계가 제공되어야 하고, 농인과 코다에 대한 교육이 전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랬을 때 농인의 차별과 문제점이 해결됐을 때 결국 코다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은 강연에서 계속 이야기하셨던, ‘우리가 서로의 어떤 돌봄, 돌봄사회를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와도 연결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영 케어러와 코다 담론을 이어보는 작업을 처음 시작했고, 이 속에서 많은 개념들을 말씀드렸고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서 후속 작업, 글이나 영화, 논문 혹은 콘텐츠 방식으로 계속해서 제작되면 좋겠습니다.
조기현 작가님께 반짝이는 박수를 보내면서 강연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수고 많으셨고 조기현 작가님 마지막으로 하실 말 있으신가요?
[코다연구사업 대중강연 2회차] 영 케어러와 코다
영 케어러(young carer)는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콜·약물의존을 가진 가족 등을 돌보고 있는 청년을 일컫는 말입니다. 농인 부모의 자녀인 코다도 영 케어러로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영 케어러의 눈으로 코다를, 코다의 눈으로 영 케어러를 이야기합니다.
강연자: 조기현 (작가, 영화감독)
스무 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새파란 돌봄’이 됐다. 아버지를 돌보며 겪은 일을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 담았고, 치매가 시작된 아버지의 노동과 생애를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로 기록했다. 영 케어러 일곱 명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모아 『새파란 돌봄』을 썼다. 영 케어러 자조모임 ‘N인분’을 운영 중이다.
사회 및 대담: 이길보라 (코다코리아 대표)
일시 : 2022.07.06.(수) 20-22시
장소 : 줌(ZOOM)을 활용한 실시간 비대면 강의
대상: 누구나
신청방법: 하단 QR코드 혹은 링크
참가비: 무료
수어통역, 문자통역 제공
주최: 코다코리아
전체 영상
수어통역 : 이한나, 조미혜
문자통역 : 에스유디컴퍼니
주최 : 코다코리아
강연 기록
이길보라 : 지난 번에는 수어유산으로서의 수어에 대해서 코다 당사자이자 수어통역과 교수로 활동하는 수(Su)가 코다가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는지, 코다가 사용하는 수어란 무엇인지, 유산으로서의 수어는 무엇인지 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강의였다면, 오늘 강의는 한국 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영케어러 담론과 코다 담론을 함께 이어보는 작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저희도 처음 하는 것이고 영케어러 담론을 계속해온 조기현 작가님도 이 강연을 통해서 처음으로 코다 담론과 영케어러 담론이 어떻게 함께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이야기해주실 거라 생각하는데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돌봄이라고 하는 것, 코다가 어렸을 때부터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할 돌봄이라는 것. 코다도 농인 부모의 돌봄을 하기 위해서 사회적 자원이 필요하고, 코다 당사자 역시 계속해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사회적 돌봄이라는 것, 보편적 돌봄이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강연을 해주실 조기현 작가님을 제가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 조기현 작가님을 모시게 된 이유는 영 케어러 당사자이자, 작가이자 활발한 활동을 하시면서 한국사회에 영 케어러 담론을 알리셨는데요. 영 케어러 담론을 지켜보면서 영 케어러가 하는 경험들과 고민들이 코다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 케어러가 뭘까?’ 하고 조기현 작가님이 쓰신 책과 쓰신 기사들을 많이 찾아봤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보면 볼수록 영 케어러의 이야기가 코다의 이야기와 똑같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 조부모를 돌본 경험들이 코다의 경험과 몹시 똑같다, 그리고 사실은 영 케어러라는 집단 안에 코다의 경험도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영 케어러 담론과 코다 담론이 함께 갔을 때에 서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조기현 작가님을 모시고 이런 저런 논의를, 영 케어러에 대해서 배우고 이런 저런 논의를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조기현 작가님을 오늘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조기현 작가님은 스무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새파란 돌봄이 되었다고 소개하는 분인데, 영 케어러 당사자이고 아버지를 돌보면서 겪은 일을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 라는 책으로 담았고, 그다음으로 최근에는 영 케어러 당사자의 이야기를 엮은 〈새파란 돌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영화도 만드십니다. 아버지의 노동과 생애를 〈1포, 10KG, 100개의 생애〉라는 영화로 만드셨고요. 개인적으로 글도 쓰고 영화를 만드시는 분이라, 저도 그렇기 때문에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 케어러들의 자조모임 『N인분』을 운영하셔서 코다코리아의 고민과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당사자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저는 조기현 작가님을 이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반짝이는 박수소리로 환영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기현: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조기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영 케어러이고, 20살 때부터 했던 경험을 좀 더 공유하고,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서 책을 썼고요. 그 책을 쓴 이유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 케어러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책을 만들기 위해서 정책 현장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길보라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 강의를 준비하면서 제가 활동하면서 놓치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됐어요. 바로 코다의 경험을 어떻게 영 케어러 지원책 안에서 풀어낼 수 있느냐 라는 고민을 이전부터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동시에 분명 코다의 경험들이 한국 언론이나 정부에도 파악이 됐는데, 그건 왜 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논의의 장에 들어오지 못했는가. 이런 고민도 조금 남기는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는 이제 조금 알려진 말인것 같아요. 코다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사회 많은 곳곳에 설명해야 되는 곳이 많은데요. 포스터에 영 케어러가 뭔지 설명을 해놨습니다. 한번 읽어볼게요. ‘영 케어러는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콜, 약물의존을 가진 가족 등을 돌보고 있는 청년을 일컫는다. 농인 부모의 자녀인 코다도 영 케어러로 자라고 태어납니다. 코다의 눈으로 영 케어러를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강의 목적까지 적었습니다.
오늘은 말 그대로 교차점을, 대담에서 집중해서 말씀을 나눌거고요. 영 케어러 이슈가 갑자기 등장해서 몇 개월만에 대책도 마련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이러는데, 이것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그리고 무엇의 징후이냐. 저는 영 케어러가 단순히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조금 더 가시화 한다. 이 사회에서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가 조금 더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데 있어서 짚어볼 수 있는 함의들이 있다는 것을 같이 이야기 나눠보려고 합니다.
그 다른 사회라고 하면 바로 돌봄이 중심이 된 사회. 누군가 돌보는 것이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사회로 가는 이행의 지점들이 있다. 그러려면 언론에서 “영 케어러, 불쌍해.” 이렇게 다루는 시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고, 그것을 좀 더 다른 결론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 케어러의 성격과 쟁점을 먼저 이야기 나누려고 해요.
앞으로 어떤 쟁점들이 있느냐.
영 케어러는 이러한 청년이다 라고 정의 하는 것을 넘어서 외부의 맥락들을 여러분들에게 세세하게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영 케어러와 돌봄 사회에서는 우리가 영 케어러라는 존재를 영(young)에 집중할 거냐. 케어(care)에 집중할 것이냐에 따라서 그릴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다의 경험도 마찬가지로 어떤 경험들에 집중해서 중심이 되지 못한 경험을 이 사회의 중심 경험으로, 이 사회의 중심으로 놓을 것이냐를 같이 논의할 장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대담을 하려고 합니다.
영 케어러의 성격과 쟁점입니다. 올해 2월에 영 케어러에 대한 지원 정책이 정부 단위에서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원정책은 세세하게 다 설명드리지 않을게요. 이건 검색하면 나오기도 하고, 제가 중요한 건 뒤에서 언급할텐데 사실 돌봄서비스의 양을 늘리겠다. 그리고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잘 발굴하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는 보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보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영 케어러가 어려움을 겪는데, 그것이 중첩된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집에서 돌봄을 해야 되고 보호자로서 역할을 해야 되는데, 거기에 들이는 시간도 있는데 청년기, 청소년기에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학원 다 다니고 공부도 하고 진로나 취업에 필요한 진로 이행에 대한 부담도 한편 지고 있고, 동시에 어느 경우에는 부모님이 아프다 보니까 생계에 많은 부분까지도 담당하고 있더라. 그래서 삼중의 부담 ‘진로, 돌봄, 생계’의 부담을 지고 있는 중첩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게 정부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입니다. 이건 뒤에 가서 더 설명드릴텐데, 중첩된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낼 것이냐. 꽉 짜여져 있는 실뭉치를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마련할 것인지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띄운 '22살 청년 간병인의 살인'이라는 기사가 가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강도영 사건이라고 이야기가 많이 됐는데요. 우리가 영 케어러 대책이 급물살을 탄 건 이 이슈가 작년 12월에 회자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작년 5월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11월에 대선 후보들이나 국무총리가 ‘22세 청년이 간병인을 살인한 것이 단순히 살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복지나 돌봄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문제도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면서 회자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서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22세 청년 간병인의 일은 과연 이 사람에게만 일어날 일이었는가? 라는 쟁점인데요.
그 이유중 하나로 먼저 간병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간병인은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러고 나서 병원비가 없어서 삼촌에게 병원비를 달라고 손을 벌립니다. 실제로 자기도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를 가야 할 시기였는데 취업도 마땅치 않고, 그러다 보니까 돈을 계속 빌리게 되는데 친구들한테는 생활비로 할만한 1~2만원 빌리고, 삼촌한테는 2천만원 가량의 간병비를 빌렸습니다. 그런데 삼촌조차도 이 돈을 이혼을 감수하고 몰래 빌려준 돈이라고 해요. 결국 이것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청년 간병인이 이 아버지를 살해하게 된, 굶겨서 더이상 내가 아버지를 책임지지 않게 되는 선택들의 맥락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세 가지 함의가 있는데 이 세 가지 함의는 사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나에게 위기가 됐다.’라고 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호소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한번 볼게요. 내가 가족을 부양하면서 위기를 겪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위기의 종류, 성격을 가장 많은 비율이 첫 번째로는 당연히 부양의 자녀 양육과 부양의 어려움을 들고요. 그다음 경제적 어려움입니다. 그다음은 갑작스러운 질병. 질병에 대한 돌봄이나 보호, 간병도 해야 되고, 병원비도 내야 하는 이 세 가지가 중첩되는 상황이 아까 이야기했던 강도영 씨의 상황인데, 한국사회 전연령이 이것을 똑같이 호소하고 있다면,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인구구조와 가족문제가 바뀌면서 가족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인구도 계속 고령화되고 저출생의 상황에서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한 사건으로만 고정적으로 귀결해서 보지 말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먼저 이것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어렵다고 호소하는 세가지가 다 몰려 있는 사건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격적으로 영 케어러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영 케어러 초반에 얘기할 때는 영 케어러가 아동 또는 청소년 혹은 청년 이렇게 정의가 다양해요. 그러다 보니까 도대체 영 케어러 나이 연령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단어를 보자마자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영 케어러는 진로이행시기에 자기가 어떤 미래에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노력해야 될 시기에 당장의 생계나 돌봄까지 해야 된다는 문제의식으로 명명하게 되는 말인데요. 근데 나라별로 이 시기를 규정하는 나이는 다릅니다. 영국은 아동 시기로 정해서 만18세 이하로 정했고, 호주는 초기 청년 넘어서 25세로 나이를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국가별로 진로이행시기의 어려움이 어디까지 가느냐가 쟁점이 될것 같습니다. 혹은 보완하는 다른 정책이 있느냐는 고민이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영 케어러가 만약 18세까지라면, 영 어덜트 케어러라는 방식으로 취업을 도와주는 정책도 필요하다. 나이가 30세가 될 때 까지 그 진로이행의 어려움은 계속되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을 돌보면서 밀리지 나이가 들었다고 해결되거나 풀리지 않는 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단순히 내가 주 돌봄자, 전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정 내에서 장애가 있거나 아픈 사람이 있으면 계속 주돌봄자는 아니더라도 보조해서 계속 돌보는 상황. 주돌봄자가 자리를 비울 때 돌보는 상황도 영 케어러의 특징 중 하나다. 네가 좀 더 잘 하라거나, 어른스럽게 해야 된다거나 이런 압박으로 조금 더 부모님을 보조하는 역할을 잘 하는 영 케어러들도 있죠. 그래서 그런 영 케어러까지 포함해야 된다. 이런 역할과 위치와 주돌봄자뿐 아니라 보조돌봄자까지. 그리고 나이는 여러 상황으로 논의되고 있고, 보통 18세까지 영 케어러로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은 2월에 발표했고 4월에 1차 조사를 했고, 그중에서 굉장히 많은 수의 유의미한 집단이 나왔다고 해요. 양적 조사로. 그래서 2차 조사를 실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연령구분을 청소년 인구도 하고, 만 34세까지 한국에서 청년기본법이라는 법에 의해서 정의된 청년 나이까지 같이 조사합니다. 굉장히 넓은 나이 폭의 조사예요. 근데 그중에 하나는 한국에서 만 34세까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문제의식에서 만 34세라는 나이를 정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하기 직전까지 국제비교에서는 영 케어러 인식과 정책대응 수준에서 1단~7단계로 한다면 한국은 7단계, 무반응국가. 아무런 대응도 없는 국가로 이야기됐습니다.
그런데 가장 우리가 뒤에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가장 높은 국가가 2단계가 영국이에요. 그런데 영국은 커뮤니티 케어, 지역사회 돌봄을 이야기할 때 굉장히 많이 참조하는 나라입니다. 1980년대부터 커뮤니티 케어를 진행해왔고, 또 하나 영국의 특이점은, 영국은 아예 법으로 '비공식 무급 돌봄자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라는 이념을 가진 케어러 액트라는 법이 2014년부터 시행중입니다. 비공식 돌봄자도 지원하고, 일상에서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가족들을 지원하는 행위에도 문제 의식을 갖고 대응하고 있고, 커뮤니티 케어로 대응하는데, 거기에 플러스 영 케어러도 대응하고 있는 거죠.
한국사회는 지역사회 돌봄(이 있는데), 지난 정부 내내 말은 많이 들었지만 우리 눈앞에 과연 어땠느냐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시범사업의 유무도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지금 이런 고민들도 뒤에서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 규모는 국제기구상으로 아직은, 곧 공개되겠지만, 청소년 인구로만 보면 한국에서 그 정도 주돌봄자, 보조돌봄자까지 합쳐서 18만에서 30만까지로 추정합니다. 많은 숫자이고, 이 숫자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나 시민단체가 전무하다는 것도 정말 뭔가 희귀한 일이죠. 그래서 이런 조사결과가 나오면 구체적인 숫자가 확인될것 같습니다. 공통적으로 이야기되는 부분들을 제가 추려왔어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제가 아무래도 급성기 질환, 갑자기 쓰러지고 장기들이 아프고, 수술받고 하는 급성질환 이후에 만성화 되고 인지가 저하되고, 치매가 시작되거나 이런 경우에 영 케어러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까 그쪽 이야기가 치우쳐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코다의 경험들을 읽어보면서 다르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돌봄의 역할을 지원하거나 준비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간이 없이 바로 어느 날 갑자기 돌봄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돌봄을 나눠지거나 협력할 수 있는 어른이나 가족이 없다는 것도 특이점 중 하나입니다. 형제는 아직 너무 어리거나 본인도 어리니까 동생은 더 어리다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책임을 안 넘기는 경향도 있고요. 가족 규모가 축소되고 핵가족화 되기 때문에 협력할 수 있는 어른이 없고 혼자 감당해야 되는 상황을 어린 시절부터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중 부담.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다닐 때 사실 퇴근하고도 여전히 일을 해야 되는 상황. 그것은 가사일 수도 있고, 돌봄일 수도 있고, 이중 부담을 계속 지고 있는 상황. 그리고 고립의 문제. 이 경험들. 아픈 가족을 돌봤다는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많이 어려움들을 호소했습니다.
코다도 마찬가지로 이 경험들은 코다코리아로 연결되기 전에 고립됐던 것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정말 판박이처럼 비슷한데, 어렸을 때 부터 책임을 다하라는 말, 효자효녀가 되라는 압박은, 어른들은 그것이 억압인지 모르고 그 아이의 노고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쓰기도 하고 딱히 할말이 없어서 하기도 하는 말이죠. 이런 압박, 공통적으로 '착한 아이' 압박 같은 것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 케어러의 특이점일 수 있는데, 부모나 형제가 빨리 아프다 보니 돌봄정책의 서비스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 대부분 생계지원도 정확한 병명이나 장애가 없으면 65세 이하, 노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로능력이 있고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 왜 일을 하지 못하느냐는 말을 공통적으로 주민센터에 가서 듣고 터벅터벅 아무것도 못 받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고요.
그런데 동시에 그렇게라도 찾아가면 한편으로 다행입니다. 정말 그런 것도 있는지 몰라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병원비가 많이 나오고, 우리에게 재산이 없을 때 긴급복지의료지원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바로 구청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는데,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안 알려주죠. 저조차도 며칠 전에 또 아버지가 심장이 안 좋아져서 입원하게 됐는데, 입원하는 모든 전 과정에서 이런 정책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팜플렛이나 아무것도 사실은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정책 접근성의 문제가 오히려 또래들끼리 그런 경험이 많으면 "이런 거 해봐. 재난적 의료급여가 있더라."라는 이야기를 할텐데 그런 커뮤니티조차 없다는 것이 큰 문제 중 하나고요.
그리고 가족책임이라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건 코다도 사실은 태어나자마자 겪게 되는 문제이기도 할텐데, 이게 내가 뭔가를 수행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수행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같아요. 제도적으로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여전히 의료비에 한해서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의료급여라고 하는 제도에는 부양의무자 기준의 폐지계획이 없습니다. 지금 까지. 그리고 어느 기관에 가거나 대리를 하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기 때문에 그런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수 있는 사람의 책임이 당연히 늘 수 밖에 없는 행정절차 시스템을 우리가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어떤 판단을 내리거나 어떤 사람에게 중대한 판단을 내릴 때 의식이 없을 때, 병원에서 특히. 그걸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어떤 의료법에도 가족이 그런 것을 해야 된다는 것을 상정한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으로 당연히 가족이 그런 결정을 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서비스를 신청할 때도 어떤 기관이, 복지기관이 발굴해서 전화를 하면 건강보험공단에서 "가족 아니시죠?"라는 것부터 묻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것이 문화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굉장히 많은 부분 가족에게 다 떠넘기고 있다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거환경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주거환경, 집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해야 된다 라고 했을 때 어쨌든 아픈 사람이 한 자리를 점유하고 방에 있는 상태에서 학습하지 못한다 라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또 저 같은 경우는 계속 계단이 많은 집,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계단이 많거나 하는 집에 있다 보니까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하면 집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을 계속 겪었습니다. 그런 주거환경은 장애, 탈시설 문제에서도 계속 겪는 이슈가 나오는 문제죠.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환경, 혹은 돌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또 하나는 돌봄 과정에서 내가 파산할 수도 있다. 내가 더이상 노후나 내 안전도모할 수 있는 돈을 모아놓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돌봄이 끝난 이후는 특히 급성기, 아픈 중증질환을 겪은 돌봄자들, 영 케어러들에게는 죽음이 상시적으로 가까운 상황이고 죽음 이후에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고민을 계속 하게 되는데, 사실 돌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2~3년 쓰신 분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재취업을 할 수 있을까. 이 시간을 보상받을 수 없을까 라는 고민을 자주 나누는 내용 중 하나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어려움들이 왜 발생하느냐 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발생하는 것에 어떤 함의들을 봐야 하느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구가 변화하면서 이런 경험은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저출생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나면 내 또래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동시에 내가 형제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고령화. 비혼, 만혼화의 경우는 내가 아이로서 태어나면 부모, 조부모의 나이가 나보다 많다는 의미겠죠.
그러니까 고령화 저출생 환경은 사실 필연적으로 케어의 역할이 좀 더 빨리 당도할 수 밖에 없다. 영 케어러가 출연하기에 아주 적합한 요소다. 한국의 빠른 인구 변화가 이런 문제를 가속화시킬 수 밖에 없다는 징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돌봄이라는 것이 청소년기, 청년기에 무관하다. 청소년기, 청년기는 단순히 보호받아야 하고 학습하고 원가정에서 독립하는 과정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어떻게 그 시기에 생애과업이라고 하는 것, 그 생애에 해야 되는 것들을 돌봄과 잘 어우러지게 할 수 있느냐. 생애주기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세팅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대두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래서 정상가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흐르면 안 된다는 것. 영 케어러는 아주 분명하게 ‘정상가족’, 따옴표 친 정상가족 모델의 한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영 케어러들을 가까이서 보다 보면 급성기 질환을 겪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머니가 아프거나 집에 어머니가 없는 편부 가정, 한부모 가정에서 많은 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기존에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돌봄역할을 잘 해야 된다는 성별 분업이 위기를 맞으니까 영 케어러가 출연하는 맥락이 생기거든요.
이런 ‘정상가족’ 중심, 가정 내에서 돌봄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는 이 모델의 실패를 말해주는 존재가 영 케어러이기도 하죠. 가장 큰 부분은 ‘영 케어러가 부담하는 것이 혹은 코다가 부담하는 것이 너무 힘들것 같아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왜 그렇게 하고 있는 일들이 저평가 되고 있는가’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해야 됩니다. 누구가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것에 대해서 공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고, 이전에 돌봄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나. 사회에 나가는데 손해가 되거나 불이익이 되는가에 대해서 충분하게 고민해야 되는 문제가 영케어러 문제인것 같습니다.
잠깐 이야기했었죠. 우리가 한국에서 지역사회 통합 돌봄, 커뮤니티 케어라는 말은 있는데 실체는 없는 그것과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지원하고 돌보는 행위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는 있으나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한번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 케어러는 돌봄 제공자에 대한 체계적으로 첫 번째 지원을 선언한 것에 가까운 것이거든요.
그러면 이 의미를 우리가 어디까지 견인할 수 있는가. 어떤 이슈까지. 영 케어러를 통해서 커뮤니티케어는 어떻게 가고, 비공식돌봄지원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확장시켜야 할 지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코다도 마찬가지로, 아주 많은 비율이라고 들었는데, 영 케어러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가 엄청 심각함에도 자신을 영 케어러 정체화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돌봄 경험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못하고, 또 자신이 이걸 이야기해서 차별을 겪을 것 같다. 혹은 이 역할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게 아니라는 중첩된 문제로, 정체화하지 않고 지원이 있어도 지원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현장에서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제가 마주하면서 했던 고민은 뭐냐면, 사회적으로 부를 말은 생겼고, 어떤 어떤 역할들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정의 하는 것은 효자, 효녀로 부르는 것과 얼마나 다르고 같은가. 결국 그게 나쁘게 작동하면 사회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정의 했던 역할들이 "이런 역할은 해야 돼."라는 압박으로 작동하지 않나.이런 고민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와 코다로서 하는 경험, 차별적인 경험. 저는 영 케어러가 취업하는 과정에서 불이익, 내가 혹시라도 면접관이 내가 부모를 돌본다는 것을 알아봐서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차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린시절 갑자기 선생님이 반에서 불러서 초등학생 시절에 효행상을 주면서 "부모님이 아픔에도 너는 잘 돌보는 구나." 선언하고 인정해주지만 본인은 차별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영 케어러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차별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고민도 계속 남기는 부분 같습니다.
그리고 영 케어러가 계속 영 케어러일 수 없겠죠.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진로도, 생계도, 돌봄도, 그 문제도 계속 지속되면서 나이가 계속 들어갈 겁니다. 그러면 그 나이 들어가는 케어러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고민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사실 이제 국가가 제도화 하기 위해서 실태조사를 하고 법제화 하는 과정에서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처럼 있는 질문들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 케어러가 단순히 한 집단을 지원하자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여러 이슈들을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에 한번도 논의되지 않았던 방식의 어떤 돌봄, 어떤 한 존재가 돌보는 행위를 이 사회가 어떻게 그 사람의 것으로만 두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 것이고, 영 케어러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논의할 수 있는 것. 영 케어러뿐 아니라 전생애 케어러, 전반자에 대해서 고민하고 지금 코다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혹은 비장애 형제 경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등 다양한 이슈들을 모아서 사실은 이야기할 수 있는 장으로써 활용해야 되지 단일한 인구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아직은 되어서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코다의 경험을 인식하고, 정부가 인식할 수 있었거나 인식하고 있음에도 지원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왜 한발 물러서 있는가. 이런 고민을 들게 해서 그 부분을 말씀드릴게요.
이건 그냥 대부분 다 아픈 가족이 있을 때 어떤 역할을 하고 형제를 돌보고 가계를 담당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5번과 7번에 밑줄 친 이유는 제일 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제일 소외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한번 밑줄 쳐봤습니다. 5번. 영 케어러의 정의가 모국어가 제1언어가 아닌 가족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을 위해 통역하는 역할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알코올, 약물, 도박에 의존하는 중독 문제를 겪고 있는 가족을 보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에, 작년 말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오늘 부터 시행한다는 대책을 볼게요. 조기파악, 상담지원 등은 한국이랑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3번은 가사육아 지원이 있습니다. 영 케어러 지원인데 왜 육아를 지원하나 할 텐데, 일본은 한부모가정이나 부모가 아프거나 할 때 형제를 돌보는 영 케어러가 많더라는 게 데이터로 증명돼서 형제를 돌보는 그리고 등하원, 유치원을 데려다주고 집에 같이 오고 하는 것들을 담당해주는 것을 지원하겠다. 형제돌봄의 의무를, 부양의무를 내려주겠다는 것이 3번의 목적입니다. 4번은 우리가 지금 장애인활동지원처럼 가정에 돌볼 사람이 있으면 지원시간이 줄어들잖아요. 4번은 영 케어러면 시간을 줄이지 않겠다. 다시 말하면 영 케어러는 돌봄을 하는 사람으로 상정하지 않고 서비스를 지원하겠다는 것이 4번입니다. 그런데 뭔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통역을 담당하는 일이나 중독에 대해서 중독 케어, 문제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방지하는 일에 대한 대책은 구체적으로 수립되지 않았고 왜 이 대책과정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의 사례예요. 이채림님이고, 지금은 1년이 지났으니까 이 방송이 1년 지났는데, 이채림님은 두분 다 농인 부모님 밑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급성기 영 케어러가 됐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이것저것 금융, 보험, 복지 등을, 병원 문제 등을 계속 오가면서 힘들어 하고 있는 와중에 뇌출혈 카페에 쓴 글 하나로 시사직격에 출연하게 됐다고 해요. 그런데 이채림 님이 영 케어러 문제로 자신의 경험을 단 4~5번의 방송에서 송출을 했는데 한번도 코다의 경험이 나온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왜, 왜 영 케어러 호명하기 위해서 당사자를 찾았음에도 이 경험을 정부와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는가. 이 문제를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코다코리아가 생겼기 때문에, 저도 회원이기 때문에, 코다코리아가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 되고 저의 입장에서 무엇을 더 고민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남겼던 일인것 같아요.
이채림 님은 처음부터 가감없이 자신이 겪었던 영 케어러의 경험을 잘 이야기해주시는 분인데 이것은 왜 편집되어 다루어지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이 들면서 또 이것을 방증하는 것은 저 조차도 경험을 말씀해달라고 했으면서도 이 대책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 처음에는 잘 구상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지원대책 중에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됩니다.
저는 영 케어러들을 만나고, 그것을 정부와 간담회 형태로 같이 이야기 나눌 때 행정업무의 부담이 굉장히 크게 나오는 일이었어요. 부모님이 해야 되는 행정업무, 여러 가지 행정업무들을 다 부담해야 되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고민하다 나온 것이 행정사, 변호사를 붙여주자. 그것을 같이 할 수 있는 혹은 혼자서 다 도맡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방안을 고민해보자 라고 하면서 이 대안이 나왔습니다. 이건 어쨌든 다른 영 케어러 지원책에 있는 건 아니고 한국에 특수하게 마을사업화 하면서 마을행정사와 변호사가 곳곳에 있죠. 서울에 한해서는 마을행정사나 변호사에게 행정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영 케어러 지원에 써보자. 그런데 코다가 해야 되는 모든 통역의 업무를 다 할 수는 없지만 마을행정사나 변호사가 코다의 존재를 인식하고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지원책에서. 이런 고민을 좀 남기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뒤에 같이 논의를 좀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 케어러와 돌봄 사회.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데요. 이제 가족 규모가 축소되고 형제 수가 줄어들죠. 예전에 ‘돌봄’ 하면 과거 여성들이 담당해야 되는 것이고, 아픈 사람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중장년쯤 됐을 때 고령 부모를 돌본다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관념 중 하나입니다. 중장년의 여성. 그런데 앞에서 계속 이야기한 것은 중장년만 돌보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도 돌볼 수 있다는 세대 문제를 다루었고요. 앞에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태어나서 성별이 남성인데 상황이 돌봄을 해야 된다면 돌봄을 해야죠. 이런 식으로 이제는 떠넘길 수 조차도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젠더 구분도 사라져서 모두 돌봄해야 되는 시대가 지금 한국사회의 변화하는 상이라면 차라리 이것을 돌봄사회로 가는 기회로 생각해보자. 단순히 위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모두 돌볼 수 있다. 돌봐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로 보자고 생각합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한번 천천히 잘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 케어러의 문제는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영(young)과 케어(care)가 갈등한다는 관점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영(young) 이라는 시기는 청년이라는 시기, 청소년, 뭔가 계속 생산하는 생산적인 시기이고, 도전하고 투자하고 경력을 쌓아야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소위 ‘생산가능인구’라고 부르는 것처럼 뭔가 계속 만들어내는 시기라고 본다면 돌봄은 비생산적이고, 어떤 손실을 계속 만들어내고, 손해 혹은 불이익을 겪게 되고, 경력이 단절되는 일이다 라는 두 가지의 관념이 사실은 영 케어러라는 영과 케어의 갈등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 사회를 나타내는 지표인것 같습니다.
이게 대표적이죠. ‘영 케어러는 원래 생계부양을 잘 해야 되는데 자신의 미래도 잘 꾸리지 못한다.’ 이 경험을 저도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렇게만 봐야 되는가. 이를 테면 앞에 이야기했던 영이라는 시기에, 청년이라는 시기에 집중해서 계속 이 문제를 봐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두 가지가 갈등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두가지가 갈등하는 양상.
우리가 누군가 보호하고 돌보는 일을 평가절하했던 양상은 낸시 프레이저라고 하는 정치 철학자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시작될 때 부터 그 평가절하하는 양상은 나타났다. 그래서 계속 뭔가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하려면 누눈가를 돌보거나 아이, 장애인, 노인을 돌보는 것이 재생산 활동을 업신 여겨야 하는 거죠. 이것에 계속 의존하면서도 이윤을 창줄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야만 자본주의는 유지되더라. 다만 더이상 사회 재쟁산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돌봄, 보호의 활동이 보상을 안 해주면 무너질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보상을 해주는 범주를 재조정하는 범주 투쟁 과정이 있다고 낸시 프레이저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그런 초기에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을 공장에 많이 데리고 가야 하니까 남성, 여성, 아이 할것 없이 모두를 다 데리고 와서 일을, 모두 일을 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더이상 노동자들이 출근을 계속 반복해서 잘 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아, 가정에서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구나. 재생산 혹은 생산적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를 계속 유지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로 나온게 주부화, 주부의 발명입니다. 가정주부는 발명된 거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죠. 그리고 20세기에는 그렇게 해서 조금 임금 주고 일 시키고 가정 내에서 무급으로 돌봄, 가사를 하게 했던 것이 더이상 불능하다는, 더이상 유지가 안 된다 라는 생각이 드니까 가족임금제를 발명합니다.
가족임금제는 남성의 임금의 플러스 해서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돌봄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용을 지급하겠다 라는 아이디어죠. 그런데 그조차도 안 되니까 현재 세계화된 금융 자본주의 시기에는 모두 생계부양자, 모두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가장 삶에 만연해진 재생산 관계가 맞벌이 가족, 맞벌이 부부라고 정의 내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범주 투쟁,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뭐가 생산적인 것인지. 뭐가 이 사회를 유지하는지. 이 두개가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영 케어러, 혹은 더 나아가서 코로나 19 팬데믹을 겪었던 것도 더이상 누군가를 돌보고 사회를 유지하고 누군가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도 없고 공동체가 책임지지 않는 방식으로 떠넘기는 것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코로나19는 극단적으로 공장이 멈췄지만 사람을 돌보고 대면하는 행위는 하나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생산과 재생산이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재생산 영역을 돌보고 보호하는 영역을 어떻게 다시 범주 투쟁을 할 것이냐. 이런 문제를 남기는 부분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 중에 제가 시간이 조금 압축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나만 말씀드리면 제일 마지막에 우리 삶을 어떤 비전으로 재조직할 수 있느냐. 지금 까지 조직되어 있는 방식이 아니라 보편적 부양자 모델로 하자. 모두 돌봄하고 일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 모두 일하는 게 한국사회에서는 통용되는 사고 방식인데 모두가 일정 정도 돌봄을 부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설령 가정 내에서 돌봄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중요한 생계의 위치에 있더라도 혹은 이 돌봄을 당연히 해야 되는 위치에 있더라도 그 돌봄을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위치, 예를 들어 가정주부도 돌봄을 줄여야 하고 일을 해도 돌봄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는 돌봄을 모두 참여하는 시공간이다. 모두 참여해야 된다는 관계라는 것이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의 아이디어입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느냐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떤 사회의 모습으로 가야 하느냐를 언급하는데요.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읽어볼게요.
모든 일자리는 돌봄 제공자인 동시에 노동자인 사람들을 위한 방식으로 고안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상근직보다 지금의 상근직보다 주중 노동시간이 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취업 가능케 하는 서비스를 받게 될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어떤 일과 돌봄의 위계를 사라지게 만들고 한 사람이 충분히 자기 자신도 돌보고 타인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성의 중심, 누군가는 돌보고, 누군가는 돌보지 않는 이성의 중심의 핵가족일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가족과 타인을 돌보는 경계도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활동들이 가능한 것이 보편적인 돌봄 제공자 모델이라는 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될 사회상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영 케어러에 대해서 연구했던 키고야 도모코가 했던 이야기인데요. 단적으로 얘기하면, 이 사회에서 계속 능력 있는 사람이 중요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말하는데 나는 계속 나에게 의존하는 할머니, 아픈 할머니가 그러면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라는 이야기를 영 케어러가 직접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능력주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몫을 충분히 가져가야 한다는 한국에서 주로 이야기되고 있는 능력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는 문제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능력주의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능력주의는 어떤 인간의 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계속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어쨌든 서로가 어떤 방식으로든 의존하면서 살아왔고, 함께 섰고, 앞으로 계속 의존할 것이고, 누군가의 의존에 보답, 응답해야 되는 관계 속에 계속 있는데 이 능력주의, 특히 한국에서 말하는 한국의 능력주의적 사고 방식은 그렇게 지속해왔던 인간의 본래 모습을 부정하는 방식. 마치 모든 것이 한 출발선에 선 내가 다 얻어낸 것이고 그 능력의 원천은 내가 의존했던 관계들, 자원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 노력뿐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존재해왔고 이 사회가 유지되어왔던 의존하고 돌보고 보호해왔던 그 관계들에 대해서 우리가 저평가 하게 되는 또 우리가 해왔던 역할에 대해서도, 받았던 것에 대해서도 저평가하게 되는 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불평등을 고민할 때 굉장히 어떤 부분, 어떤 영역을 추가해서 고민할 것인가.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정동적 평등〉이라는 책입니다. 어떤 평등이냐라는 것을 주로 이야기 나누려고 하는데요. 평등과 불평등을 우리가 주로 이야기할 때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이 자원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논의할 때 보통 경제 영역,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을 많이 이야기하죠. 또 하나는 정치적으로 나를 대표해줄 수 있느냐. 혹은 정치적 참여 하는 어떤 참여할 수 있느냐 라는 것에 정치 영역에서도 평등, 불평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회문화적으로도 나를 위한 인프라가 조성되어 있느냐. 나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환경에 놓여 있지 않느냐. 이런 것들로 우리는 평등, 불평등을 계속 파악하죠. 이 책은 거기에서 더 나가서, 우리는 더 나아간다면 경제, 정치, 사회문화가 어떻게 엮이는지 이야기하는데 정동적인 측면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정동적인 측면은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정동은 이 책에서 사랑과 돌봄과 연대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1차적 돌봄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누구나 대체 불가능한 친밀성을 공유하는 관계가 있어야 된다. 그렇게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봄관계를 볼까요? 2차적인 돌봄관계는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이웃이나 동료간에 서로 도움을 주고 받거나 배려하거나 인정하거나 혹은 돌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 관계. 더 나아가서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로서의 관계. 우리는 활동지원이나 요양보호사 다 사실은 면대면으로 관계를 맺는 거죠. 물화되어서 서비스로 존재되는 게 아니죠. 이것을 2차적 돌봄관계라고 이 책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연대의 관계. 3차적 돌봄 관계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내 입장을 대표해줄 수 있는 행정기관이 있느냐. 혹은 내가 나를 대표해주는 시민단체나 연대해주는 연대체제가 있느냐 라는 것이 정동적으로 평등해지는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관계가 이 세 가지다.
도표로 보면, 이 책을 나중에 읽어보시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도표를 제시합니다. 이런 나이테 같은 느낌으로 한 사람에게 이런 관계들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리하자면, 정동적 평등은 모두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돌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하는 삶이 고르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지금 까지 돌봄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이 책을 소개시켜드린 이유는 뭐냐면, 기존에 돌봄이라는 것은 돌봄 받는 사람을 너무 수동적으로만 보고 돌봄 받는 사람, 수혜자, 돌봄 수혜자를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지 않는 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돌봄이라는 말이 시혜적이고 사적이고 여러 가지 문제시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장애계에서는 그 부분들을 대체하기 위해서 활동을 지원한다는 말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의 저도 돌봄을 이야기하고 돌봄 논의에서는 돌봄이라는 것 자체를 사람이 당연히 의존하면서 살아오는 것, 모든 사람이 의외없이 돌봄 수혜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어떻게 돌봄 제공하더라도 돌봄을 수혜하더라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관계 안에서 평등할 수 있느냐 라는 논의로 요즘 흐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자신의 방법론을 돌봄 대화 방법론이라고 설명합니다.
돌봄을 이야기할 때 조차 돌봄 제공자, 돌봄 수혜자가 모두 참여하는 대화가 되어야 우리는 그 순간 조차도 정동적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이 책은 이야기하는데요. 우리가 돌봄제공자라고 이야기하는 게 돌봄 수혜자를 소외시키지 않고 돌봄 수혜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돌봄 제공자와 어떻게 연대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는 바로 이 정동적 평의 논의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나 조차도, 저 조차도, 지금 나에게 사랑관계가 있나? 돌봄관계가 잘 조성되어 있나? 내가 취약해질 때 내 입장을 대표해줄 수 있는 연대할 수 있는 행정기관, 제도, 시민단체가 있는가? 라는 고민을 남긴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 돌봄이라는 것이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또 평등 상태로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어떤 장이다 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 영 케어러에 대한 논의와 그리고 또 영 케어러담론과 코다 담론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지. 정부가 주도하는 영 케어러 지원대책에 코다 지원대책은 왜 빠져 있고 영 케어러 안에 코다 이야기는 왜 같이 가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 부분은 코댜당사자 뿐 아니라 코다 코리아에서 논의하면서 어떻게 정책적으로 풀 수 있을지 이제부터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오늘 그래서 이 자리에 조기현 작가님을 모신 것은, 저도 제가 기억하기로는 코다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 알려질 때쯤 영 케어러라는 담론이 한국사회에 알려지고, 조기현이라는 사람을 영 케어러 당사자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부의 청년 지원 대책에 영 케어러가 잘 맞아떨어지면서 영 케어러가 수면 위로, 뉴스에도 많이냐오고 정부관계자들이 지원해야 된다고 하면서 정책적으로 갑자기 지원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 그러면 코다도 당연히 힘들고, 코다도 영 케어러와 정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코다도 영 케어러인데, 급성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가 쓰려져서 24시간 돌보는 문제는 아니지만 정말 어렸을 때 부터 일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본에는 영 케어러 논의에 모국어가 한국어죠. 한국어가 제1언어가 아닌 그래서 통역 의무가 있는 당사자들을 영 케어러라고 합쳐서 부르는데, 그걸 코다라고 부르고. 이주민들의 자녀도 그 케이스겠죠. 부모는 방글라데시어나 몽골말을 쓰지만 집 밖에서 한국말을 사용해서 부모와의 소통을 자신이 통역사로서 담당해야 되는 이주 아동들도 영 케어러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코다와도 똑같은 경험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 논의를 어떻게 같이 가져갈 수 있을까 라는 저의 고민에서 이 강연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대담을, 강연을 준비하면서 조기현 작가님의 두 책을 읽고 시부야 돈모코, 일본의 영 케어러를 조사한 연구자의 책을 읽으면서 코다 담론과 영 케어러 담론이 정말 필연적으로 같이 갈 수 밖에 없다 라고 저는 느껴졌는데요. 그리고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조기현 작가님의 책을 읽고, 조기현 작가님은 코다에 관한 책을 읽으셨을 텐데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도 궁금하고 보호자가 되는 케어의 경험, 보호자가 되어 케어되는 경험들이 똑같다고 느껴졌는데, 전반적으로 코다에 관한 이야기들과 칼럼들을 읽으셨을 텐데, 읽으시면서 어땠는지도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조기현: 작년에 거의 11월, 12월, 1월 동안 대책을 마련했던 시기여서, 좀 더 빨리 코다코리아를 만났으면 조금 더 이 문제를 영 케어러 안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 어떻게 제도화 할 수 있느냐를 적극적으로 논의했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건 영 케어러 지원대책 안에서 다뤄야 할만한 것들을 이번에 코다코리아 강연을 준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뒤늦었다고 말하기에는 이제 막 영 케어러 지원도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경험이 지금 이길보라 대표님 말씀처럼 기존에 코다의 시선으로 있는 사회 현안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볼 수 있구나 라고 읽다가 코다에 대해서 집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 경험들을 가지고 그 경험을 어떻게 사회적 대책 안에서 같이 논의될 수 있느냐 라는 것을 빨리 깨달았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누군가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것. 돌봄이라는 말을 법제화 할텐데요. 질병과 장애가 아닌 취약함, 이를테면 이주민의 자녀로서 수행해야 되는 어떤 번역의 일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지금 법률용어로 돌봄 정의 한 것은 하나도 없거든요. 대부분 서비스로서의 요양을 말하고요. 그러면 정말 급진적인 돌봄의 개념이 나올 수 있죠. 취약함 자체를 볼 수 있으니까. 한국 사회는 취약점에 대해서 지원하려고 하면 장애진단서 떼어와라. 질병진단서 떼어와라. 이런 식으로 취약점을 장애와 질병, 의료화 된 구체적인 명에 기대고 있는데요. 그게 아니라 취약함 자체에 주목할 수 있는 개념을 앞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코다, 그리고 미등록 이주아동의 경험을 겹쳐보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길보라: 말씀 들으면서 저희 코다코리아가 계속 해왔던 활동이 코다가 장애 부모아래에서, 그러니까 농인 부모 아래에서 나고 자라면서 물론 통역을 해야 되는 부담과 그리고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통역을 하고 부모를 보살펴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들을 하긴 하지만 동시에 코다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긍정적 경험 또한 있는데요. 예를 들어 수어를 잘할 수 있거나 혹은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거나 두 사회를 효율적으로 잇는 사람이 되거나 하는 방식의 긍정적 경험이 있는데, 사실 이건 거의 한국 사회에 알려지지 않고 부모가 말을 못하는 구나. 불쌍하다. 안타깝다. 그런 시선으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코다코리아의 활동과 개별 코다들은 계속해서 그게 아니다. 이 경험은 결국 다른 문화에 관한 것이고, 장애이긴 하지만 결국 다른 문화인 것이고, 그 다른 문화에서 빚어지는 차이들에 집중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그래서 우리만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계속 하다 보니까 그런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 그건 영 케어러 담론도 그런 고민들을 하실것 같아요. 영 케어러 역시 돌봄을 하면서, 나는 이 시간을 제대로 보상받고 있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취업준비할 때 그 시간을 충분히 쓰지 못하고 나는 엄마, 아빠를 보살피고 있어.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경험들을 하지만 또 동시에 그 경험이 사실 나쁜 것, 좋지 않은 것으로 100% 환원되는 것은 아닌 거잖아요. 그 경험이 사실은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회를 다르게 볼 수 있는 경험이 되는데, 코다로서의 긍정적인 경험들, 돌봄의 경험들을 긍정적으로 알리는 활동들을 주로 해왔기 때문에 코다 이슈를 정책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자체는 코다코리아에서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저희는 이 영 케어러 이슈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조기현: 영 케어러 모임을 하면서 급성이나 조현병 혹은 인지저하(치매) 가족들 영 케어러들을 만난 경험이라면 오히려 저는 사는데 있어서 그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지 않을 수 없고 사실은 슬프고 상실감을 느낄 만큼이나 기쁨도 혹은 그 일을 수행한 것에 대한 보람도 계속 느끼는데 다들 그 기쁨과 보람 혹은 배움 같은 것들을 계속 억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영 케어러 자조모임을 할 때는 정말 온갖 부정적인 것. 며칠 털어놓으면 부정적인 것이 쌓여 있는 것을 헤집으면서 긍정적인 요소들을 하나씩 찾아보는 거죠. 그렇게 찾으니까 온몸으로 파르르 하면서 이 경험이 완전히 재해석 되는 거예요. 그 시간을 이제 막 겪고 있는 것 같아요. 긍정적인 요소들을 우리가 해낸 것, 왜냐하면 못해낸 것이 계속 생각나고 죄책감이 들고 돌봄자로서 좋은 돌봄자도 아닌데 사회적으로 핍박받고 억울하고 이런 마음이 굉장히 크면 이런 경험들을 다시 하는데 까지 힘을 길러내는, 같이 하는 시간들이 많이 필요한것 같아서 애초에 그것을 발견하는 시간이 시차가 많이 드니까 오히려 사회적으로 뭘 해야 되느냐도 계속 고민하면서 긍정적인 요소들, 이 경험속에 분명 있지만 우리가 발견해내지 않았거나 사회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을 발견하는 관계의 시간들도 길었던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이 경험들을 코다코리아가 했던 경험이 어쩌면 시작점으로 가장 필요한 경험 같아요. 긍정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회적 지원 가야 하지. 그 방향을 긍정적인 요소를 죽이는 방향으로 사회가 개입하면 안 되잖아요.
영 케어러는 그런 경계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사회가 어떻게 긍정적인 요소를 극대화할 것인지. 그뿐 아니라 한 개인에게만, 그룹에게 놔두는 게 아니라 사회 전역으로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 그래서 영 케어러와 코다의 집단, 혹은 당사자들이 서로의 참조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미등록 이주아동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최근에 은유 작가님이 쓰신 미등록 이주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아까 말씀해주셨듯이, 저도 이야기했듯이, 부모가 이주해서 노동을 하는데, 부모가 체류자격이 없어서 아이또한 체류 자격이 없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어렸을 때 부터 한국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어를 잘 하고 한국어를 잘 하는데 국적은 이 나라에 등록되지 않아서 신분증이 없어서 사회에서 애로사항을 겪는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 아동들을 이야기를 읽는데, 그 이야기가 코다의 경험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부모를 위한 통역을 하거나 부모가 아직 이 사회에 동화, 말, 언어소통이 안 되니까 굉장히 많은 상황에서 부모를 통역하거나 하는 것을 보면서 미등록 아동의 경험이, 다문화 경험이 코다와 똑같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 책에는 미등록 이주아동이면서 동시에 코다인 케이스도 나오거든요. 아까 영 케어러이면서 코다의 경험을 한 영 케어러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미등록 이주아동과 코다, 영 케어러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미등록 이주아동이면서 코다, 영 케어러이면서 코다, 미등록이주 역시 영 케어러안에 포함되는 거죠. 이런 어떤 담론들을 우리가 계속 연결할 필요가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이것에 대해서 제가 지난 번에 조기현 작가님과 이야기할 때 조기현 작가님이 이것을 이렇게 보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런 이야기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조기현: 네. 제가 그래서 영 케어러 논의가 더 뭔가 몇살, 누구,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정의 내리는 건 정부가 해야 될 역할이고, 우리가 의논해야 될 것은 ‘이것도 영 케어러잖아. 어린 나이에 돌봄하고 있잖아.’ 이런 것을 계속 끄집어낼 수 있는 저수지, 장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영 케어러를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등록 이주 아동들도 "영 케어러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던 정동적 평등의 상태. 우리가 지금 한국이라는 공동체에서는 일정 정도 정동적으로 친밀성으로 끈끈한 1차적 관계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나에게 돌봄이나 보호를 해주는 사회제도, 이웃의 관계가 있을 수 있고 더 넓게는 내가 취약한 상태가 됐을 때 연대해주는 행정기관, 다른 관계가 있을 수 있는데 이주 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세 가지의 모든 관계를 한번에 박탈하는 거잖아요. 다른 영토에 아예 가서 세 가지를 박탈하는 거여서 정동적 불평등, 돌봄이라는 말을 정동적 돌봄이라는 말로 바꿔서 정동적 평등, 좋은 돌봄은 정동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돌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유기적이어야 돌봄이 가능한데, 이렇게 되면 이주아동도 그렇고, 미등록 이주 아동이 통번역을 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려고 했던 부모님도 그렇고 둘 다 정동적 불평등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냐. 단순히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혹은 사회적 약자로서 취약한 사람이 아니라 이 관계들이 어떻게 박탈되느냐. 혹은 이 사회 내에서 미등록 이주 아동이라는 것을 연대하는 단위가 행정기관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 관계들이 박탈되어 있느냐. 한국사회에서. 이런 것을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보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도 미등록 이주 아동과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지를 논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눴던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네. 그리고 지난 번에 오늘의 대담을 위해서 사전미팅을 미리 했었는데요. 그때 2인칭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도 잘 모르는 개념이어서 이후에 논문을 언급하신 눈문을 찾아봤는데, 2인칭의 윤리라는 부분이 영 케어러 당사자, 코다에게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논의들일것 같은데 영 케어러, 코다가 겪는 2인칭의 윤리가 무엇이고, 그게 영 케어러와 코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그래서 우리는 어떤 논의들을 해나가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기현: 네. 제가 원래 약간 강의 할 때는 이렇게 사적인 대화를 할 때 개념을 남발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길보라 대표님이 남발한 것들을 다 잡아서 잘 정리, 얘기하라고 해주셔서 한번 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제가 2인칭 관점의 윤리라고 하는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논문에서 만났냐면 「현장에서 2인칭 관점 윤리의 구현과 지속」이라는 조그만 소논문이었어요. 노들 장애인 야학의 활동가와 장애 당사자간의 관계를 참여관찰을 하고 쓴 건데요. 2인칭 윤리 관점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아! 이거지.' 윤리가 내가 수행하는 윤리, 혹은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해야 돼. 사회적 약자야.' 이렇게 정의 내린 3인칭의 윤리가 아니라 관계 내에서 파생되는 윤리가 있고, 그리고 어떤 관계에 응답하는 것이 윤리인 경우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아요. 말하자면 3인칭 윤리는 이 사람은 장애인이고, 이 사람은 이주아동이고, 이렇게 어떤 정책성에 기반해서 이야기하고 아주 보편적, 공동체 전반의 윤리를 고민하게 하는 윤리관점이라고 한다면 1인칭 윤리는 주체가 어떻게 윤리적으로 실천할 수 있느냐. 삶 자체가 다 주체적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논문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2인칭의 윤리는 윤리가 관계 안에서 파생될 수 밖에 없고 그리고 관계라는 것은 계속 지속적인 협상, 갈등, 여러 가지 고민들을 내재할 수 밖에 없다. 그 안에서 계속 내가 농인 부모와 나의 입장을 계속 갈등하면서, 내가 지금 아픈, 인지가 저하된 아버지와 나의 입장이 계속 갈등하면서 생겨나는 윤리 관계가 2인칭의 윤리이고 그 가능성은 내가 내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돌봄을 제공하는 부모의 입장, 제공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 사회에 대표하는 역할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개념 같아요.
실제로 농인 부모가 차별없이 살 수 있다면 코다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고, 많은 영 케어러들은 만나자마자 영 케어러로서의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거든요. ‘내가 돌보는 사람에게 이런 게 제공하지 않아요. 이 사회가 이런 것을 배제해요.’ 라는 것을 말해요. 애초에 움직여야 하는 것은 그런 부분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코다도, 영 케어러도 그렇고 2인칭 윤리의 담지자인 거지. 윤리라는 것은 완전히 소거하고 모든 것을 의무로 만드는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된다는 관점과도 대치되는 거죠. 가족이니까 당연히 돌봄해야 되고 네가 해야 된다는 역할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계속 파악되고 고민되고 지속되는 갈등과 협상으로 만들어지는 그 윤리적 실천 그 자체라는 것을 2인칭 관점의 윤리 개념이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코다가 특히 듣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농인 부모가 겪었던 경험을 내가 다른 방식으로 더 가시화 하거나 대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길보라 대표님의 칼럼을 봤는데, 그것도 2인칭 윤리 관점을 고민하는데 핵심적인 것 같아요. 듣는 권력이 있다면 활용한다면 이 공동체가 나아지는데 있어서 배제되고 차별되지 않는데 써야지. 이런 고민들을 다른 차원으로, 가족 테두리를 넘어서 다른 차원으로 고민하게 해주는 방법 같고 영 케어러 논의를 하면 항상 영 케어러의 권익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사회 습관을 깨버리는 것. 당연히 돌보는 사람의 권리를 생각하는 위치에 있는 건데 사회적으로 설득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관점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고 이렇게 남발하는 관점을 한번 정리할 수 있게 질문을 주셔서 제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이길보라: 이 개념 자체가 저도 처음 듣는 개념이어서 그 개념 자체에 대한 개념을 영 케어러와 코다 입장에서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다음 논의는 제가 단체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인데요. 영 케어러 경험들을 계속해서 풀어내는 일들을 하셨고, 이 경험 세계를 공유하는 일들을 해오셨는데 이건 코다코리아가 계속 해온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면서 코다에 대한 경험들을 계속 공유했고, 또 코다코리아의 활동가들과 함께 연구활동가들과 함께 '우리는 코다입니다'라는 책을 쓰면서 코다의 경험을 한국사회에 알리는, 경험세계를 알리는 일을 해왔는데요. 그런 저희가 그런 작업을 했던 이유가 코다의 경험을 알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 기초 자료가 나와야 이후에 코다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진행되고 더 많은 콘텐츠도 제작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코다 문제 해결을 위한, 동시에 농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들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하고 그런 활동을 먼저 해왔는데요.
물론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지만, 단번에 저희가 그런 책을 썼다고 바로 사회문제가 해결되고 코다 문제 끝 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죠. 사실 영 케어러 담론을 보면, 예상보다 빨리 정책적으로 빨리 영 케어러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해결 방식으로 먼저 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 케어러 담론을 봤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리고 동시에 영 케어러 당사자로서 개인적인 고민도 있었을 텐데, 단체 설립을 할까말까 하다가 아직은 하지 않고, 정부 정책, 영 케어러 관련한 정부 정책 만드는데 여러 가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실질적인 정책의 논의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시는데요. 이 운동의 방향과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과 소회도 있을것 같아요.
조기현: 말씀하신 대로 작년에 정부에 이슈도 더 강하게 이야기하고, 협상하고 할 수 있는 파트너 역할로서 이끌어가기 위해서 단체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계속 했다가 그당시에 아직까지도 그 당시에 왜 주저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에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영 케어러 문제는 영 케어러라는 단일집단만 대표해서 풀 수 없는 문제라는 문제의식이 저한테는 가장 크게 동기를 말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만약 제가 한국에 이런 단체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다 관장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다면 시민단체는 영국의 케어러스 UK라는 단체의 형태가 가장 적합한것 같다. 그것은 영국의 돌봄자 전반, 아픈 가족,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돌보는 돌봄자 전반에 대한 지원을 하는 전국 조직이에요. 전국 연합체 조직이고. 원래 작은 단체들이 모여서 전국 조직으로 현장 상담도 하고, 실제 이슈파이팅도 하고, 그래서 돌봄자 수당 같은 것, 적은 금액이라도 한달에 40만원 정도의 수당을 쟁취하고 그리고 케어러 액터를 통해서 비공식 돌봄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이념을 가진 일가정 양립정책, 수당정책들을 시행하게 만드는 단체가 있는데 한국에는 케어러스 KR, 돌봄자 연합 이런 식으로 전반적으로 돌봄 행위의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조직이 지금 가장 필요한 시점 같다. 그런 조직들이 계속 뭔가 없으니까 당사자 조직이 돌봄에 한해서는 돌봄을 제공하는데 한해서는 당사자 조직이 없으니까 커뮤니티 케어, 비공식 돌봄이 미비 할 수 밖에 없어요.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대표하는 말을 못 하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영 케어러, 저도 영 케어러 간담회 하면 마음이 힘들어요. 왜냐하면 사실 그런 게 아닌 데도 나쁜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만 해야 되니까.
분명히 이건 하나의 삶이고, 사회문제로 설정되기 전에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이것은 내가 사는 삶의 어떤 태도들을 만들었고 내 정체성을 만든 중요하고 고유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문제로 설정하고 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거든요. 그것을 저는 어쨌든 참고 납작해지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계속 하면서 어쨌든 빨리 시급하게 정책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곧 대선시기가 되면서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납작해지기를 어느 정도 전략적으로 택했던 것 같아요.
코다의 경험을 긍정적인 요소를 공유한다는 것은 납작해지기 전략이 아니라 두터운 경험 세계를 이 사회에 느리지만 깊게 인식하고 그것들에서 더 사실 더 자라날 수 있는 환경들을 만드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저도 그런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새파란 돌봄 낸 것도 납작해지는 경험을 보완하기 위해서 어쨌든 단순히 효자, 효녀가 아니라 영 케어러라는 구호로 만들었던 것에 대해서 빨리 시행할 수 있는 것과 이후에 사실은 돌보는 삶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략을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와중이고 그래서 참조점이 많은것 같아요. 저도 〈우리는 코다입니다〉라는 책을 영 케어러 당사자들이 냈으면 좋겠고, 더 풍부한 경험들을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그게 지금 시즌에는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 케어러 지원책을 만들어도 또 다른 이름으로 효자, 효녀를 부르고 가족체계를 강화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사회가 더이상 납작하게 누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라고 계속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그게 아마 발굴되지 않은 코다들. 발굴되지 않은 영 케어러들을 어떻게 찾아낼 것이냐. 정부가 지원한다고 해결되지 않잖아요. 그랬을 때 코다라고 커밍아웃하고, 영 케어러들이 나는 영 케어러였어 라고 말하는. 정부가 돈을 준다고 코다 당사자, 혹은 영 케어러 당사자들이 당사자로서의 자존감을 가질 수 있을리 만무하잖아요. 그래서 말씀하셨던 두터운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우리가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 여기에는 아까 말씀하셨듯이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참고 납작해지더라도 얘기해야 된다.’ 당연히 어떤 방송에서 기회가 있다면 코다로서의 경험들을 다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방송에서는 참고 납작해지고, 작게 이야기되더라도 어쨌든 효율적인 방식을 택하는 그런 고민들을 저희도 하고 있는데요. 저희도 고민을 같이 하고 있어서 코다, 영 케어러도 두터운 삶의 경험들을 느리지만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결국 오늘 말씀하셨던 이야기들이 케어, 돌봄, 영 케어러와 코다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돌봄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저희는 코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코다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농인의 문제를 해결해야 코다가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희도 항상 코다가 겪는 어려움이 뭐냐고 하면 농인이 겪는 어려움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 하는데, 영 케어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영 케어러와 코다 문제를 푼다는 것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 구조를 바꾸고 돌봄이 부재한 사회를 바꾸는 것. 보편적 돌봄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어떤 보편적 돌봄이 있는, 그리고 어떤 돌봄 민주주의 사회로 우리가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결국 연결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기현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장애인 중심주의 혹은 건강 중심주의, 아픔, 장애가 계속 예외적이고 우리한테 마치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상상하는 것 자체를 바꾸지 않는 다면 계속 영 케어러로 인정해달라, 코다 경험이 이렇게 라는 것이 전체적인 구조를 바꾸는데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치열하게 더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 케어러 탈시설 문제, 장애인 탈시설 문제처럼 지역사회에서 장애가 있더라도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은 돌봄 제공자 입장에서도 내가 고립되어 돌봄하지 않는 것. 다양한 서비스 주체들과 협력해서 잘 돌봄을 해나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역사회 통합돌봄, 장애인 탈시설,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 입원’이라고 하죠. 급성기 질환을 겪고, 그것들을 가족이 감당을 못하고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 이런 것들이 다 연결되어 고민하지 않으면 이 이슈들이 연결되어 있고,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는데 있어서는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결하는 언어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자리가 그 시작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질병을 돌보는 논의와 장애 부모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잘 연결이 안 됐거든요. 저도 신기하게 영 케어러 많이 하는데 장애가 있는 부모의 영 케어러는 만난 적이 많이 없어요. 한번 있어요. 왜 그럴까 이런 고민을 했어요. 장기요양을 받는 경험은 많은데, 장애 경험은. 그래서 어떤 생각을 했냐면, 장애 등록이 되면 영 케어러 지원이 있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건 아니고, 담론이나 실제 사회 현장에서 왜 이렇게 잘 접점을 못 맞출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 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코다코리아가 해야 되는 일들이 어떤 돌봄 사회를 만들 것인가 라는 의제와 잘 연결시키는 일들을 우리가 해나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또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대담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남은 시간이 한 10~15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혹시 질문 있으신 분은 손을 들고 질문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지금 김상화 님께서 좋은 강의 해주신 조기현 작가님께 감사드린다고 채팅 남겨드렸는데, 저는 코다에 대한 생각으로 부터 영 케어러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무지한 상황에서 질문드린다고 하셨습니다.
김상화 : 코다는 긍정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아왔는데, 코다와 다른 영 케어러는 부정적인 측면과 정부지원에 관한 것이 더 부각되어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영케어러의 긍정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례가 있을까요? 그러면 저의 무지가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기현: 일단은 긍정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을 말하자면,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프고 내 돌봄을 하고 있다는 것을 편견없이 말할 수 있는 어떤 환경이 문화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돌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스스로도 많은 부분 그렇게 평가해요. 위기해결능력이 뛰어나졌고 누군가의 감정을 읽거나 상황이나 상태를 읽는데 있어서 뭔가 남들보다 잘 하는 것 같다. 어떤 역할들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좀 더 능숙하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이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리고 누군가 약간 그런 돌봄이나 취약한 환경에 있을 때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한국에 있는 영 케어러 연구자, 책 시부야 도모코의 책에서 마지막에 영 케어러 해결책은 영 케어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 만들기가 해결책이거든요. 긍정적인 요소와 문화적인 요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한편, 또 한편으로 안전하게 만드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커뮤니티 케어, 여러 가지 지원이나 지역사회 돌봄이나 혹은 장애가 있거나 아픈 당사자에 대한 지원이 있는 상태에서 해야 되는데 지금은 영 케어러들이 아무런 지원없이 자기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긍정적인 말하기, 공간에 대해서 쉽게 말하기는 저도 심적부담이 큰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넉넉한 사회적인 돌봄 서비스가 제공되는 와중에 그런 이야기를, 그런 게 가능한데, 실제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저도 자조모임 내에서 어떻게 할지 이런 고민들을 계속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종국에는 돌봄이 우리가 어떻게 긍정적인 측면들로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한 요소인지. 돌봄이 이것을 설명해야 돌봄사회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계속 고민하게 되는 부분 같습니다.
이길보라: 네. 그 부분은 코다에게도 마찬가지 같아요. 다른 코다들을 만나면서 자기 삶의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그것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시공간이 생겼을 때 비로소 이게 긍정적인 경험이었네? 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차후에 조금씩 생기거든요. 그런 시공간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수 있을까. 그게 영 케어러와 코다의 몫인가. 사회가 같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질문이 채팅으로 하나 올라왔는데, 혹시 손을 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까요? 황지성 님은 박수를 치면서 손을 드셨는데, 질문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지성: 안녕하세요. 저도 코다코리아 회원이고요. 황지성이라고 합니다. 저도 코다이기도 하고, 지금 장애와 돌봄에 대해서 사실 연구논문을 하고 있어서 되게 많은 기대를 하고 오늘 참여했는데요. 역시나 제가 돌봄에 대해서 연구를 했지만 영 케어러 담론이 한국에서 너무 최신의 담론이어서 아직 이것까지는 제가 볼 생각을 못 한것 같은데요. 오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소위 말해서 전통적인 돌봄 논의와 되게 결코 떨어뜨릴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던것 같고, 유용한 개념들과 아이디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코다와 영 케어러 이런 부분은 앞에서 대담을 통해서 이길보라님과 다른 분들도 많이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그냥 영 케어러에 집중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영 케어러 가지고 정부와 많이 이야기하셨다고 하셨는데, 저는 정부와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게 너무 짐작되는 거죠. 한국에서 장애와 돌봄의 역사를 봤을 때 정말 장애인 부모님 아래에서 산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진짜 서바이버다 라고 할 정도로 장애에 대한 돌봄 체계가 없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생존자가 아닌가 할 정도로 너무 없는데, 청년 정책에 들어갈 것 같아요. 돌봄정책이 아니라. 그렇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게 돌봄이지만 동시에 또 청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캐치하는 게 빠를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정부가 어떤 복지를 한다고 했을 때 엄청나게 뭔가 대단한 것을 꺼내주는 것처럼 하면서 좁게 범주 설정하고 지원의 근거를 되게 합리적인 근거를 끄집어내려고 이런 것들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영 케어러 관련해서 나온 구체적인 지원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그것과 관련해서 싸우실 때 너무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돌봄에 대해서 투쟁한 것에 오랜 역사에 비하면 쉽게, 그냥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라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고요. 그런 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그다음에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영 케어러라는 단일집단, 소수의 집단, 특정집단이 아니라 넓은 어떤 돌봄 패러다임을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시겠다고 하시는 거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합니다만, 계속 정부와 만나면 점점 납작해져야 하고, 그나마 소수집단이라도 정부가 주겠다고 하는 것마저 혹시나 뺏겨 버릴 수 있는 위험까지 있는 그정도로 한국정부가 돌봄에 대해서 진짜로 태도가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런 걱정까지 든다는 거죠.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하시는 부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기현 : 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주셨네요. 저는 근데 약간 제가 단체가 없잖아요. 단체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어떤 마음이었냐면, 일단 띄우자. 어쨌든 얘기라도 되게 하자. 제가 장애인계에서 투쟁하는 것처럼 법률안을 만들고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 까지 가지 않았잖아요. 지금 논의가 막 시작됐으니까. 진짜 힘든 것은 그때부터 일 것 같고. 현재는 실태조사 하겠다 까지 와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존재가 있고, 어떻게 방향이 설정될지도 고민해야 되지만 청소년, 청년들이 부담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 만으로도 일보진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이후의 미션들은, 대신 좀 계속 중간에서 정부가 설득될 수 있을 만한 언어들을 위원회 테이블에서 쓰면서 동시에 나는 그걸 전체 그림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나.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너무 납작하게 말할 수 밖에 없고, 근거들을 바로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이야기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이를 테면 미등록 이주 아동, 대부분 등록이 됐다고 해도 통역의 일은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어쨌든 이주 배경의 아동이 만약 영 케어러와 돌봄이라고 설정한다면 이 돌봄이 어떻게 힘든지 강조하겠죠. 저는 뒤에서 담론적 층위에서는 이런 고민을 하겠죠. 더이상 질병, 장애로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취약함 자체로 확장되는 시발점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이런 전체 그림을 정부가 하는 게 다가 아니라 민간 영역에서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 움직임들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지금도 기아대책, 생명의 전화 등에서 영 케어러 어떻게 지원할지. 해보고 싶다. 각자의 노하우가 활용되는 거예요.
생명의 전화는 자살, 심리상담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설계하고, 초록어린이재단은 커뮤니티 케어 안에서 아동, 그리고 학교라는 것을 어떻게 다루느냐. 이것에 대해서 전문성을 가진 아동보호전문 관점에서 다루고, 기아대책도 이전부터 계속 그런 자활 2세대가 수급자 가정을 지원하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경험을 영 케어러에서 어떻게 풀어낼까를 고민하거든요. 당연히 기부금 재단들이 보이기식도 있고, 그 안에서 한두명의 실무자가 열심히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민간에서 잘하면 언제 정부지원사업이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여러 가지 기대를 두고 여러 가지 네트워크들에 협력 하는 중이다. 그 정도로 지금은 제 역할 혹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답이 됐을까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어서 충분하게 답을 못한 것 같지만 좀 더 제대로 뭔가 답이 안 됐다면 더 질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지성: 아닙니다. 밤새서 이야기해야 될것 같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길보라: 네. 이 논의들은 황지성 선생님은 '우리는 코다입니다'라는 책을 같이 쓰기도 하셨고, 논문을 현재 쓰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가 같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멘트로 김현성 선생님께서 일하느라 늦게 참여해서 앞의 강의를 못 들어서 아쉽다고 했는데 유튜브로 나중에 풀로 공개할 것이기 때문에 놓친 것들은 열심히 들으시면 좋겠고요.
질문은 영 케어러와 코다에 대해서 정부, 지방정부 차원에서 어떤 지원이 있으면 좋을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해야 할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짧게 대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조기현 : 네. 사실 지원이란 게 따로 없다고 해야 할까요. 이미 있는 지원을 못 받고 있다는 문제 의식으로 발굴하고 연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요. 그리고 영 케어러, 코다 지원은 아니지만, 아까 설명드렸던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복지부와 시범 사업을 하고 있는데 행정사와 변호사를 붙여서 어린 나이에 행정 업무의 부담을 줄이겠다고 사업하고 있는데, 마을 행정사나 변호사가 코다, 영 케어러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얼마만큼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을 활용해서 지원할 수 있느냐 라는 문제를 앞으로 고민해봐야 될 것 같다. 어떤 지원이 딱 있다고 하기에는 발굴하고 기존의 복지 서비스들을 연계하겠다는 것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지자체의 기사를 보면 여기저기마다 뭘 하겠다고 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들여다 보면 영 케어러를 발굴하겠다. 이 이상은 못 간 것 같습니다.
이길보라: 코다 같은 경우는 코다들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코다에게 주어진 통역의 의무나 이런 것들을 통역의 의무를 코다들이 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학교든, 정부 기관에서든 사회적인 어떤 통역 체계가 제공되어야 하고, 농인과 코다에 대한 교육이 전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랬을 때 농인의 차별과 문제점이 해결됐을 때 결국 코다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은 강연에서 계속 이야기하셨던, ‘우리가 서로의 어떤 돌봄, 돌봄사회를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와도 연결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영 케어러와 코다 담론을 이어보는 작업을 처음 시작했고, 이 속에서 많은 개념들을 말씀드렸고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서 후속 작업, 글이나 영화, 논문 혹은 콘텐츠 방식으로 계속해서 제작되면 좋겠습니다.
조기현 작가님께 반짝이는 박수를 보내면서 강연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수고 많으셨고 조기현 작가님 마지막으로 하실 말 있으신가요?
조기현: 앞으로 계속 고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길보라 : 오늘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